책소개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명나라 문학자 풍몽룡(馮夢龍)이 북송 초에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고대 소설 모음집인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원전이 되는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한대(漢代)부터 북송 초에 이르는 소설 · 필기 · 야사 등의 전적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광범위하게 채록해, 총 500권에 6965조로 정리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는 것처럼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다 담고 있다. 이 때문에 《태평광기》는 이후 역사서에 인용되기도 하고 후대의 문학 작품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파생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은 몇 가지 문제를 낳았다. 분량이 너무 많다 보니 인쇄도 쉽지 않고, 교정도 쉽지 않아 판본에 많은 오류가 발생했다. 더해서 독자들이 읽기에도 부담스러웠다. 풍몽룡은 《태평광기초》의 머리말인 〈소인(小引)〉에서 “옛사람은 고사를 인용할 때 출처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출처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큰 소리로 ‘《태평광기》에 나온다’라고 말했다. 그 권질이 방대해서 사람들이 열람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풍몽룡은 당시 부실한 《태평광기》 출판 상황을 개탄하면서 이대로 방치할 경우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결국 폐기될 것을 우려해, 보다 체계적이고 엄정하게 편집한 《태평광기》 선본을 간행하고자 했다. 이에 500권 92류(類)에 총 6965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던 《태평광기》 중 번잡하고 중복 수록된 고사를 삭제하고, 배치가 잘못된 것들을 정리해 전체 80권 82부(部)에 총 2584조의 고사로 편찬했다. 《태평광기》에 분리되어 수록되었던 고사를 《태평광기초》에서 병합한 고사가 400여 조이므로 실제로는 약 3000여 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는 셈이다.
《태평광기초》의 가장 큰 특징은 비주(批注)와 평어(評語)다. 비주는 지면의 상단 여백에 기록하는 미비(眉批), 고사의 원문 사이에 기록하는 협비(夾批)와 협주(夾注)가 있는데, 《태평광기초》에 기록된 미비는 1842개이고 협비와 협주는 269개다. 평어는 고사의 중간이나 말미에 해당 고사에 대한 풍몽룡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거나 해당 고사와 관련된 다른 고사를 인용해 논평한 것으로 218개에 달한다. 미비는 특정한 대목에 풍몽룡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밖에 부류를 설명하거나 어려운 글자에 대한 독음과 뜻을 설명한 경우도 있다. 협비와 협주는 고사의 중간중간에 풍몽룡의 즉흥적인 느낌을 기록한 경우가 가장 많으며, 그 밖에 특정한 인물·명물·사건에 대해 설명한 경우도 있다. 평어는 풍몽룡의 이성적 사고, 도덕적 가치관, 역사 인식, 인정세태에 대한 감회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비주와 평어는 풍몽룡의 사상과 가치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해당 고사를 읽는 독자들의 보다 흥미로운 감상과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돕는 아주 유용한 장치라고 하겠다.
이렇듯 《태평광기초》는 문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역사, 민속학적으로도 문헌적 가치가 무척 높은 필기 문헌이나,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아직 번역 성과가 없는 형편이다. 필기 문헌 전문 연구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는 세계 최초로 《태평광기초》를 번역, 교감, 주석해 완역 출간한다. 《태평광기초》의 원전 텍스트에 대한 보다 쉽고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삼아 이후 더욱 활발한 연구 성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200자평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고대 소설집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편찬한 설화집으로, 일명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고 한다. 전 500권의 이 방대한 이야기를 명나라 풍몽룡이 중복되는 것은 삭제하고 잘못 배치된 이야기는 정리해 80권으로 엮고 자신의 비평을 첨가한 책이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다. 내용이 재미있을 뿐 아니라, 중국 고전 소설 비평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중국 필기문학의 전문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가 세계 최초로 번역해 소개한다. 10권에는 술과 음식에 내용을 다룬 권46 〈주식부(酒食部)〉부터 여러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권50 〈기교부(伎巧部)〉까지를 수록했다.
엮은이
《태평광기초》를 평찬(評纂)한 풍몽룡(馮夢龍, 1574∼1646)은 중국 명나라 말의 문학자로, 자(字)는 유룡(猶龍)·공어(公魚)·자유(子猶)·이유(耳猶) 등이고, 호(號)는 향월거고곡산인(香月居顧曲散人)·고소사노(姑蘇詞奴)·오하사노(吳下詞奴)·전전거사(箋箋居士)·묵감재주인(墨憨齋主人)·전주주사(前周柱史)·녹천관주인(綠天官主人)·무원외사(茂苑外史)·평평각주인(平平閣主人) 등이다. 남직례(南直隸) 소주부(蘇州府) 장주현(長洲縣,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 사람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형 풍몽계(馮夢桂)와 동생 풍몽웅(馮夢熊)과 함께 “오하삼풍(吳下三馮)”으로 불렸다. 숭정(崇禎) 7년(1634)에 복건성(福建省) 수녕지현(壽寧知縣)을 지냈으며,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에 종사했다. 만년에는 반청(反淸) 운동에 가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근심과 울분 속에서 죽었다.
그는 명나라 최고의 통속 문학자로, 소설로는 가장 유명한 의화본 소설(擬話本小說)인 삼언(三言), 즉 《유세명언(喻世明言)》·《경세통언(警世通言)》·《성세항언(醒世恒言)》을 비롯해 《태평광기초》·《평요전(平妖傳)》·《열국지(列國志)》·《정사유략(情史類略)》 등을 편찬했고, 희곡으로는 《묵감재정본전기(墨憨齋定本傳奇)》, 민가집으로는 《산가(山歌)》·《괘지아(掛枝兒)》, 산곡(散曲)으로는 《태하신주(太霞新奏)》, 소화집(笑話集)으로는 《소부(笑府)》, 필기로는 《고금담개(古今譚槪)》·《지낭(智囊)》 등을 편찬했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민간 문학에 집중되어 있어서 통속 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옮긴이
김장환(金長煥)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남북조지인소설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교수(2004∼2005), 같은 대학교 페어뱅크 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객원교수(2011∼2012)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이다.
그동안 쓴 책으로 《중국 문학의 흐름》, 《중국 문학의 향기》, 《중국 문학의 향연》, 《중국 문언 단편 소설선》, 《유의경(劉義慶)과 세설신어(世說新語)》, 《위진세어 집석 연구(魏晉世語輯釋硏究)》, 《동아시아 이야기 보고의 탄생−태평광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 연극사》, 《중국 유서 개설(中國類書槪說)》, 《중국 역대 필기(中國歷代筆記)》, 《세상의 참신한 이야기−세설신어》(전 3권),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전 4권), 《세설신어 성휘운분(世說新語姓彙韻分)》(전 3권), 《태평광기(太平廣記)》(전 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 8권), 《봉신연의(封神演義)》(전 9권), 《당척언(唐摭言)》(전 2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고사전(高士傳)》, 《어림(語林)》, 《곽자(郭子)》, 《속설(俗說)》, 《담수(談藪)》, 《소설(小說)》, 《계안록(啓顔錄)》, 《신선전(神仙傳)》, 《옥호빙(玉壺氷)》, 《열이전(列異傳)》, 《제해기(齊諧記)·속제해기(續齊諧記)》, 《선험기(宣驗記)》, 《술이기(述異記)》, 《소림(笑林)·투기(妬記)》, 《고금주(古今注)》,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원혼지(寃魂志)》, 《이원(異苑)》, 《원화기(原化記)》, 《위진세어(魏晉世語)》, 《조야첨재(朝野僉載)》(전 2권),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전 2권)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에 관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있다.
차례
권46 주식부(酒食部)
주(酒)
46-1(1326) 술 이름(酒名)
46-2(1327) 천일주(天日酒)
46-3(1328) 금간주(擒奸酒)
46-4(1329) 청전주(靑田酒)
46-5(1330) 곤륜상(崑崙觴)
46-6(1331) 벽통주(碧筒酒)
46-7(1332) 소장주(消腸酒)
46-8(1333) 점우주(黏雨酒)
46-9(1334) 남방주(南方酒)
주량(酒量)
46-10(1335) 정현(鄭玄)
46-11(1336) 유표(劉表)
46-12(1337) 배홍태(裴弘泰)
46-13(1338) 왕원중(王源中)
46-14(1339) 술 마시지 않음의 이점(不飮)
식(食)
46-15(1340) 오후의 섞어찌개(五侯鯖)
46-16(1341) 드렁허리 요리에 대한 의론(䱉議)
46-17(1342) 한구(寒具)
46-18(1343) 열낙하(熱洛河)
46-19(1344) 유명한 음식(名食)
46-20(1345) 망가진 말다래(敗障泥)
46-21(1346) 대병(大餅)
46-22(1347) 양만(羊曼)
식량(食量)
46-23(1348) 범왕(范汪)
46-24(1349) 송 명제(宋明帝)
46-25(1350) 부견의 세 장수(苻堅三將)
권47 악부(樂部)
악(樂)
47-1(1351) 사연·사광·사연(師延·師曠·師涓)
47-2(1352) 마융(馬融)
47-3(1353) 만보상(萬寶常)
47-4(1354) 왕영언(王令言)
47-5(1355) 당 태종(唐太宗)
47-6(1356) 이사진(李嗣眞)
47-7(1357) 배지고(裴知古)
47-8(1358) 영왕(寧王)
47-9(1359) 송연(宋沇)
47-10(1360) 봉성악·순성악(奉聖樂·順聖樂)
47-11(1361) 심아교(沈阿翹)
47-12(1362) 의종(懿宗)
47-13(1363) 원정견(元庭堅)
가(歌)
47-14(1364) 진청과 한아(秦靑·韓娥)
47-15(1365) 척 부인(戚夫人)
47-16(1366) 이귀년(李龜年)
47-17(1367) 막 재인(莫才人)
47-18(1368) 이곤과 한회(李衮·韓會)
47-19(1369) 미가영(米嘉榮)
악기(樂器)
47-20(1370) 함양궁의 연주하는 동상(咸陽宮銅人)
47-21(1371) 백옥 피리(白玉琯)
47-22(1372) 한중왕 이우(漢中王瑀)
47-23(1373) 피리 부는 노인과 독고생(吹笛叟·獨孤生)
47-24(1374) 허운봉(許雲封)
47-25(1375) 경옥으로 만든 경쇠(輕玉磬)
47-26(1376) 녹옥으로 만든 경쇠(綠玉磬)
47-27(1377) 이사회(李師誨)
47-28(1378) 유도강(劉道强)
47-29(1379) 조 황후(趙后)
47-30(1380) 이면(李勉)
47-31(1381) 번씨·노씨·뇌씨(樊氏·路氏·雷氏)
47-32(1382) 장홍정(張弘靖)
47-33(1383) 채옹(蔡邕)
47-34(1384) 우적(于頔)
47-35(1385) 치조비(雉朝飛)
47-36(1386) 광릉산(廣陵山)
47-37(1387) 보슬(寶瑟)
47-38(1388) 저승의 음악(冥音錄)
47-39(1389) 나흑흑(羅黑黑)
47-40(1390) 배낙아(裴洛兒)
47-41(1391) 양귀비(楊妃)
47-42(1392) 단사(段師)
47-43(1393) 한중왕 이우(漢中王瑀)
47-44(1394) 황보직(皇甫直)
47-45(1395) 왕기(王沂)
47-46(1396) 관 별가와 석 사마(關別駕·石司馬)
47-47(1397) 완함(阮咸)
47-48(1398) 현종과 영왕 부자(玄宗·寧王父子)
47-49(1399) 황번작(黃幡綽)
47-50(1400) 이귀년(李龜年)
47-51(1401) 송경(宋璟)
47-52(1402) 두홍점(杜鴻漸)
47-53(1403) 이완(李琬)
47-54(1404) 동고(銅鼓)
47-55(1405) 서월화(徐月華)
47-56(1406) 전승기(田僧起)
47-57(1407) 조운(朝雲)
47-58(1408) 이위(李蔚)
47-59(1409) 산을 몰아가는 방울(驅山鐸)
권48 서부(書部)
서(書)
48-1(1410) 문자의 시작(書始)
48-2(1411) 급현의 무덤에서 나온 책(汲冢書)
48-3(1412) 왕융(王融)
48-4(1413) 소하(蕭何)
48-5(1414) 진경좌(陳驚座)
48-6(1415) 초현과 초성(草賢·草聖)
48-7(1416) 팔분서(八分書)
48-8(1417) 종요와 종회(鍾繇·鍾會)
48-9(1418) 위탄(韋誕)
48-10(1419) 왕희지(王羲之)
48-11(1420) 순여(荀輿)
48-12(1421) 왕헌지(王獻之)
48-13(1422) 대안도와 강흔(戴安道·康昕)
48-14(1423) 왕승건(王僧虔)
48-15(1424) 소자운(蕭子雲)
48-16(1425) 스님 지영과 지과(僧智永·智果)
48-17(1426) 난정서를 구입하다(購蘭亭序)
48-18(1427) 왕방경(王方慶)
48-19(1428) 당 태종(唐太宗)
48-20(1429) 구양순(歐陽詢)
48-21(1430) 우세남과 저수량(虞世南·褚遂良)
48-22(1431) 고정신(高正臣)
48-23(1432) 스님 회소(僧懷素)
48-24(1433) 정 광문(鄭廣文)
48-25(1434) 이양빙(李陽冰)
48-26(1435) 장욱(張旭)
48-27(1436) 노홍선(盧弘宣)
48-28(1437) 진원강(陳元康)
권49 화부(畫部)
화(畫)
49-1(1438) 열예(烈裔)
49-2(1439) 경군(敬君)
49-3(1440) 모연수(毛延壽)
49-4(1441) 조기(趙岐)
49-5(1442) 유포(劉褒)
49-6(1443) 장형(張衡)
49-7(1444) 서막(徐邈)
49-8(1445) 조불흥(曹不興)
49-9(1446) 왕헌지(王獻之)
49-10(1447) 고개지(顧愷之)
49-11(1448) 고광보(顧光寶)
49-12(1449) 종병(宗炳)
49-13(1450) 원천(袁蒨)
49-14(1451) 양자화(楊子華)
49-15(1452) 장승요(張僧繇)
49-16(1453) 밑그림(畫本)
49-17(1454) 염입덕과 염입본(閻立德·閻立本)
49-18(1455) 왕유(王維)
49-19(1456) 한간(韓幹)
49-20(1457) 위숙문(韋叔文)
49-21(1458) 이사훈(李思訓)
49-22(1459) 오도현(吳道玄)
49-23(1460) 금교도(金橋圖)
49-24(1461) 주방(周昉)
49-25(1462) 관휴(貫休)
49-26(1463) 황전(黃筌)
49-27(1464) 성화(聖畫)
49-28(1465) 염광(廉廣)
49-29(1466) 범 산인(范山人)
49-30(1467) 왕흡(王洽)
49-31(1468) 장조(張藻)
49-32(1469) 그림에 대한 고찰(畫考)
49-33(1470) 풍소정(馮紹正)
49-34(1471) 위무첨(韋無忝)
권50 기교부(伎巧部)
기교(伎巧)
50-1(1472) 노반(魯般)
50-2(1473) 호관(胡寬)
50-3(1474) 능운대(凌雲臺)
50-4(1475) 진사왕(陳思王)
50-5(1476) 스님 영소(僧靈昭)
50-6(1477) 《수식도경》과 관문전(水飾圖經·觀文殿)
50-7(1478) 십이진거(十二辰車)
50-8(1479) 양무렴(楊務廉)
50-9(1480) 마대봉(馬待封)
50-10(1481) 정원(丁媛)
50-11(1482) 구순(區純)
50-12(1483) 왕숙(王肅)
50-13(1484) 장형(張衡)
50-14(1485) 인기국 여공과 오 부인(因祇國·吳夫人)
50-15(1486) 투계(鬭鷄)
50-16(1487) 한지화(韓志和)
50-17(1488) 왕고(王固)
50-18(1489) 새와 짐승의 말을 구별하다(別鳥獸語)
50-19(1490) 가흥현의 새끼줄 기예(嘉興繩技)
50-20(1491) 활쏘기(射)
50-21(1492) 울지경덕(尉遲敬德)
50-22(1493) 하 장군(夏將軍)
50-23(1494) 장분(張芬)
50-24(1495) 머리카락 관통을 비롯한 여러 기예(貫髮諸藝)
50-25(1496) 바둑(弈棋)
50-26(1497) 탄기(彈棋)
50-27(1498) 장구(藏鈎)
50-28(1499) 투호(投壺)
50-29(1500) 잡희(雜戲)
책속으로
46-7(1332) 소장주(消腸酒)
장화(張華)가 빚은 순주(醇酒)는 세 가지 고비를 삶은 물에 누룩과 보리 움을 담가 만들었다. 보리 움은 서강(西羌)에서 나고 누룩은 북호(北胡)에서 났다. 호인(胡人)들이 사는 곳에는 지성맥(指星麥)이 있었는데, 4월에 화성(火星)이 나타날 때 그 보리를 수확해서 먹었다. 보리 움을 물에 담가 놓은 뒤 사흘이 지나면 보리에서 싹이 났다. 동틀 녘 첫닭이 울 때 그것을 사용했기에 세간에서는 그것을 “계명맥(鷄鳴麥)”이라 불렀다. 그것으로 술을 빚으면 술맛이 깨끗하고 좋았으며 향기가 사람을 기쁘게 했다. 하지만 그 술을 오랫동안 머금고 있으면 이가 흔들렸다. 만약 크게 취했을 때 몸을 흔들지 않으면 사람의 창자가 헐어 문드러졌다. 그래서 당시에 그 술을 “소장주”라고 불렀으며, 또 “구온주(九醞酒)”라고도 했다.
장화가 귀해지고 나서 젊었을 때 알고 지내던 친구가 찾아오자, 장화는 그와 함께 이 술[구온주]을 마시고 만취했다. 장화는 늘 이 술을 마실 때마다 취해 잠이 들면 노복에게 자기가 깨어날 때까지 몸을 계속 굴려 달라고 분부했다. 협 : 이와 같은 술을 마시는 것이 또한 뭐가 즐겁단 말인가! 그런데 그날 저녁에는 [그 친구에게도 그렇게 해 주라고] 분부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노복은 평상시대로 장 공(張公 : 장화)을 위해 그의 몸을 굴려 주었지만, 그 친구에게는 그렇게 해 줄 사람이 없었다. 날이 밝았지만 친구가 여전히 일어나지 않자, 장화가 놀라 소리치며 말했다.
“아! 죽었겠구나!”
장화가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했더니 과연 술이 창자를 뚫고 흘러나와 침상 아래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47-49(1399) 황번작(黃幡綽)
황번작(黃幡綽)도 음률에 조예가 있었는데, 황상[현종]이 한번은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오게 했으나 제때에 도착하지 않았다. 황상이 노해 잇달아 사자를 보내 그를 찾아오게 했다. 황번작은 이미 당도했지만 궁전 옆에서 황상이 갈고를 연주하는 소리를 듣고 한사코 알자(謁者)를 제지하며 [자신이 온 것을] 고하지 못하게 했다. 잠시 후에 황상이 또 시종관에게 물었다.
“황번작이 왔느냐?”
하지만 황번작은 또 알자를 제지했다. 황상이 연주하던 곡을 끝내고 다시 곡을 바꿔서 막 몇 소절을 연주했을 때 황번작이 곧장 달려 들어갔다. 황상이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황번작이 말했다.
“멀리 떠나는 친구가 있어서 성 밖까지 배웅하러 갔습니다.”
황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갈고 연주를 끝내고 황상이 말했다.
“다소 늦었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까 화났을 때 네가 도착했다면 필시 화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생각해 보니 너는 궁에 들어와서 50여 일 동안 명을 받들다가 잠시 하루 외출한 것이니, 다른 곳에 다녀온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
황번작이 감사의 절을 올리고 났더니 내관 중에 서로 마주 보고 얘기하며 웃는 사람이 있었다. 황상이 그 이유를 캐물었더니, 황번작이 아까 당도했는데도 갈고 소리를 들으며 때를 기다렸다가 들어간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황상이 황번작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가 말했다.
“황상께서 한창 화가 나셨을 때와 화가 풀어지셨을 때를 아는데 모두 조금의 착오도 없었습니다.” 미 : 음률을 아는 것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면 신에 가깝다.
현종은 그를 남다르다고 여기면서 다시 목소리를 높여 그에게 말했다.
“내 마음속의 일을 어찌 시종관 따위가 갈고 소리를 듣고 헤아릴 수 있단 말이냐? 그러면 지금은 내 마음이 어떤지 말해 보겠느냐?”
그러자 황번작은 섬돌 아래로 달려 내려가 북쪽을 향해 허리를 굽힌 채 큰 소리로 외쳤다.
“칙명을 받들어 금계(金鷄)를 세우겠습니다.”
현종은 크게 웃으며 화를 멈추었다.
48-8(1417) 종요와 종회(鍾繇·鍾會)
위(魏)나라의 종요는 자가 원상(元常)이다. 그는 젊어서 유승(劉勝)을 따라 포독산(抱犢山)으로 들어가서 3년 동안 서법을 공부한 끝에 마침내 위(魏)나라 태조(太祖 : 무제)·한단순(邯鄲淳)·위탄(韋誕) 등과 함께 운필(運筆)에 대해 논의했다. 그때 종요가 위탄에게 채백개(蔡伯喈 : 채옹)의 필법에 대해 물었으나, 위탄은 아까워서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종요가 스스로 가슴을 치며 피를 토하자, 태조가 급히 오령단(五靈丹)으로 그를 구해 살려 냈다. 그 후 위탄이 죽자 종요는 사람을 시켜 그의 묘를 도굴하게 해서 마침내 채백개의 필법을 얻었는데, 이로 인해 종요의 필법은 더욱 절묘해졌다. 종요는 정심해서 서법을 공부했는데, 누워 있을 때는 이불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 연습을 하느라 이불 홑청이 뚫어졌으며, 측간에 가서는 골똘히 생각하느라 종일토록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또한 온갖 사물을 볼 때마다 모두 그 형상을 글씨로 표현해 보곤 했다. 종요는 삼색서(三色書)에 뛰어났으며, 가장 절묘한 것은 팔분서(八分書)였는데 〈위수선비(魏受禪碑)〉가 최고다.
평 : 사광(師曠)은 눈에 연기를 쐬어 멀게 함으로써 음악에 정통했고, 종원상(鍾元常 : 종요)은 피를 토함으로써 서법에 정진했으니, 전심전력하지 않고 학문을 이루는 자는 없다.
종회는 자가 사계(士季)이며 종원상(鍾元常 : 종요)의 아들이다. 그는 서법에 뛰어났으며 부친의 기풍을 지니고 있었는데, 힘과 기골을 좀 더 갖추었다. 한번은 종회가 순욱(荀勖)의 글씨를 위조해 순욱의 모친 종 부인(鍾夫人)에게서 보검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그 후 종회의 형제가 천만금을 들여 저택을 지어 아직 이사하지 않았을 때, 순욱이 그의 새집에 종원상의 모습을 몰래 그려 놓았는데, 종회 형제는 집에 들어가서 그것을 보고 크게 애통해했으며 종신토록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순욱의 그림 역시 종회와 같은 경우다.
평 : 종 진서(鍾鎭西 : 종회)는 다른 사람의 글씨를 절묘하게 모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등애(鄧艾)의 상주문을 고친 일이 있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