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명나라 문학자 풍몽룡(馮夢龍)이 북송 초에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고대 소설 모음집인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원전이 되는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한대(漢代)부터 북송 초에 이르는 소설 · 필기 · 야사 등의 전적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광범위하게 채록해, 총 500권에 6965조로 정리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는 것처럼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다 담고 있다. 이 때문에 《태평광기》는 이후 역사서에 인용되기도 하고 후대의 문학 작품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파생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은 몇 가지 문제를 낳았다. 분량이 너무 많다 보니 인쇄도 쉽지 않고, 교정도 쉽지 않아 판본에 많은 오류가 발생했다. 더해서 독자들이 읽기에도 부담스러웠다. 풍몽룡은 《태평광기초》의 머리말인 〈소인(小引)〉에서 “옛사람은 고사를 인용할 때 출처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출처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큰 소리로 ‘《태평광기》에 나온다’라고 말했다. 그 권질이 방대해서 사람들이 열람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풍몽룡은 당시 부실한 《태평광기》 출판 상황을 개탄하면서 이대로 방치할 경우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결국 폐기될 것을 우려해, 보다 체계적이고 엄정하게 편집한 《태평광기》 선본을 간행하고자 했다. 이에 500권 92류(類)에 총 6965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던 《태평광기》 중 번잡하고 중복 수록된 고사를 삭제하고, 배치가 잘못된 것들을 정리해 전체 80권 82부(部)에 총 2584조의 고사로 편찬했다. 《태평광기》에 분리되어 수록되었던 고사를 《태평광기초》에서 병합한 고사가 400여 조이므로 실제로는 약 3000여 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는 셈이다.
《태평광기초》의 가장 큰 특징은 비주(批注)와 평어(評語)다. 비주는 지면의 상단 여백에 기록하는 미비(眉批), 고사의 원문 사이에 기록하는 협비(夾批)와 협주(夾注)가 있는데, 《태평광기초》에 기록된 미비는 1842개이고 협비와 협주는 269개다. 평어는 고사의 중간이나 말미에 해당 고사에 대한 풍몽룡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거나 해당 고사와 관련된 다른 고사를 인용해 논평한 것으로 218개에 달한다. 미비는 특정한 대목에 풍몽룡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밖에 부류를 설명하거나 어려운 글자에 대한 독음과 뜻을 설명한 경우도 있다. 협비와 협주는 고사의 중간중간에 풍몽룡의 즉흥적인 느낌을 기록한 경우가 가장 많으며, 그 밖에 특정한 인물·명물·사건에 대해 설명한 경우도 있다. 평어는 풍몽룡의 이성적 사고, 도덕적 가치관, 역사 인식, 인정세태에 대한 감회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비주와 평어는 풍몽룡의 사상과 가치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해당 고사를 읽는 독자들의 보다 흥미로운 감상과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돕는 아주 유용한 장치라고 하겠다.
이렇듯 《태평광기초》는 문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역사, 민속학적으로도 문헌적 가치가 무척 높은 필기 문헌이나,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아직 번역 성과가 없는 형편이다. 필기 문헌 전문 연구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는 세계 최초로 《태평광기초》를 번역, 교감, 주석해 완역 출간한다. 《태평광기초》의 원전 텍스트에 대한 보다 쉽고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삼아 이후 더욱 활발한 연구 성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200자평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고대 소설집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편찬한 설화집으로, 일명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고 한다. 전 500권의 이 방대한 이야기를 명나라 풍몽룡이 중복되는 것은 삭제하고 잘못 배치된 이야기는 정리해 80권으로 엮고 자신의 비평을 첨가한 책이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다. 내용이 재미있을 뿐 아니라, 중국 고전 소설 비평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중국 필기문학의 전문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가 세계 최초로 번역해 소개한다. 6권에는 여러 사물에 대한 지식을 담은 권26 〈박물부(博物部) 호상부(好尙部)〉부터 과거 제도와 씨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권30 〈공거부(貢擧部) 씨족부(氏族部)〉까지를 수록했다.
엮은이
《태평광기초》를 평찬(評纂)한 풍몽룡(馮夢龍, 1574∼1646)은 중국 명나라 말의 문학자로, 자(字)는 유룡(猶龍)·공어(公魚)·자유(子猶)·이유(耳猶) 등이고, 호(號)는 향월거고곡산인(香月居顧曲散人)·고소사노(姑蘇詞奴)·오하사노(吳下詞奴)·전전거사(箋箋居士)·묵감재주인(墨憨齋主人)·전주주사(前周柱史)·녹천관주인(綠天官主人)·무원외사(茂苑外史)·평평각주인(平平閣主人) 등이다. 남직례(南直隸) 소주부(蘇州府) 장주현(長洲縣,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 사람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형 풍몽계(馮夢桂)와 동생 풍몽웅(馮夢熊)과 함께 “오하삼풍(吳下三馮)”으로 불렸다. 숭정(崇禎) 7년(1634)에 복건성(福建省) 수녕지현(壽寧知縣)을 지냈으며,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에 종사했다. 만년에는 반청(反淸) 운동에 가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근심과 울분 속에서 죽었다.
그는 명나라 최고의 통속 문학자로, 소설로는 가장 유명한 의화본 소설(擬話本小說)인 삼언(三言), 즉 《유세명언(喻世明言)》·《경세통언(警世通言)》·《성세항언(醒世恒言)》을 비롯해 《태평광기초》·《평요전(平妖傳)》·《열국지(列國志)》·《정사유략(情史類略)》 등을 편찬했고, 희곡으로는 《묵감재정본전기(墨憨齋定本傳奇)》, 민가집으로는 《산가(山歌)》·《괘지아(掛枝兒)》, 산곡(散曲)으로는 《태하신주(太霞新奏)》, 소화집(笑話集)으로는 《소부(笑府)》, 필기로는 《고금담개(古今譚槪)》·《지낭(智囊)》 등을 편찬했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민간 문학에 집중되어 있어서 통속 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옮긴이
김장환(金長煥)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남북조지인소설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교수(2004∼2005), 같은 대학교 페어뱅크 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객원교수(2011∼2012)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이다.
그동안 쓴 책으로 《중국 문학의 흐름》, 《중국 문학의 향기》, 《중국 문학의 향연》, 《중국 문언 단편 소설선》, 《유의경(劉義慶)과 세설신어(世說新語)》, 《위진세어 집석 연구(魏晉世語輯釋硏究)》, 《동아시아 이야기 보고의 탄생−태평광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 연극사》, 《중국 유서 개설(中國類書槪說)》, 《중국 역대 필기(中國歷代筆記)》, 《세상의 참신한 이야기−세설신어》(전 3권),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전 4권), 《세설신어 성휘운분(世說新語姓彙韻分)》(전 3권), 《태평광기(太平廣記)》(전 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 8권), 《봉신연의(封神演義)》(전 9권), 《당척언(唐摭言)》(전 2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고사전(高士傳)》, 《어림(語林)》, 《곽자(郭子)》, 《속설(俗說)》, 《담수(談藪)》, 《소설(小說)》, 《계안록(啓顔錄)》, 《신선전(神仙傳)》, 《옥호빙(玉壺氷)》, 《열이전(列異傳)》, 《제해기(齊諧記)·속제해기(續齊諧記)》, 《선험기(宣驗記)》, 《술이기(述異記)》, 《소림(笑林)·투기(妬記)》, 《고금주(古今注)》,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원혼지(寃魂志)》, 《이원(異苑)》, 《원화기(原化記)》, 《위진세어(魏晉世語)》, 《조야첨재(朝野僉載)》(전 2권),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전 2권)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에 관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있다.
차례
권26 박물부(博物部) 호상부(好尙部)
박물(博物)
26-1(0647) 위사와 유아(委蛇·兪兒)
26-2(0648) 수양신(首陽之神)
26-3(0649) 이부(貳負)
26-4(0650) 동방삭(東方朔)
26-5(0651) 제갈각(諸葛恪)
26-6(0652) 육경숙(陸敬叔)
26-7(0653) 호종(胡綜)
26-8(0654) 왕찬(王粲)
26-9(0655) 장화(張華)
26-10(0656) 뇌환(雷煥)
26-11(0657) 속석(束晳)
26-12(0658) 왕이(王摛)
26-13(0659) 심약(沈約)
26-14(0660) 부혁(傅奕)
26-15(0661) 학처준(郝處俊)
26-16(0662) 맹선(孟詵)
26-17(0663) 당 문종(唐文宗)
26-18(0664) 단성식(段成式)
26-19(0665) 이사고(李師古)
26-20(0666) 맥망(脈望)
호상(好尙)
26-21(0667) 유헌지(劉獻之)
26-22(0668) 한유(韓愈)
26-23(0669) 두겸과 이덕유(杜兼·李德裕)
26-24(0670) 독고급(獨孤及)
26-25(0671) 송지손(宋之愻)
26-26(0672) 반언(潘彦)
26-27(0673) 주전의(朱前疑)
26-28(0674) 선우숙명과 권장유(單于叔明·權長孺)
권27 지인부(知人部) 교우부(交友部)
지인(知人)
27-1(0675) 흉노의 사자(匈奴使)
27-2(0676) 환온(桓溫)
27-3(0677) 양소(楊素)
27-4(0678) 이적(李勣)
27-5(0679) 요숭과 장열(姚崇·張說)
27-6(0680) 양씨 형제와 목씨 형제(楊穆弟兄)
27-7(0681) 이단(李丹)
27-8(0682) 정인(鄭絪)
27-9(0683) 위수(韋岫)
27-10(0684) 위선(韋詵)
27-11(0685) 묘 부인(苗夫人)
27-12(0686) 반염의 처(潘炎妻)
교우(交友)
27-13(0687) 종세림(宗世林)
27-14(0688) 예형(禰衡)
27-15(0689) 순거백(荀巨伯)
27-16(0690) 혜강(嵇康)
27-17(0691) 산도(山濤)
27-18(0692) 상동왕과 곽왕(湘東王·霍王)
27-19(0693) 장열(張說)
27-20(0694) 원백(元白)
27-21(0695) 유방(柳芳)
27-22(0696) 육창(陸暢)
권28 의기부(義氣部)
의기(義氣)
28-1(0697) 곽원진(郭元振)
28-2(0698) 적인걸(狄仁傑)
28-3(0699) 오보안(吳保安)
28-4(0700) 허당(許棠)
28-5(0701) 주간로(周簡老)
28-6(0702) 후이(侯彝)
28-7(0703) 방광정(房光庭)
28-8(0704) 이의득(李宜得)
28-9(0705) 양성(陽城)
28-10(0706) 요유방(廖有方)
28-11(0707) 이약(李約)
28-12(0708) 배도(裴度)
28-13(0709) 융욱(戎昱)
28-14(0710) 낙양의 거자(洛中擧子)
28-15(0711) 정환고(鄭還古)
28-16(0712) 강릉의 선비(江陵士子)
28-17(0713) 무덤을 도굴한 도둑(發冢盜)
28-18(0714) 풍연(馮燕)
권29 협객부(俠客部)
협객(俠客)
29-1(0715) 이정(李亭)
29-2(0716) 규룡 구레나룻의 협객(虬髯客)
29-3(0717) 호증(胡證)
29-4(0718) 고 압아(古押衙)
29-5(0719) 곤륜의 노비(昆侖奴)
29-6(0720) 승려 협객(僧俠)
29-7(0721) 도성 서쪽 객점의 노인(京西店老人)
29-8(0722) 노생(盧生)
29-9(0723) 침상 아래의 의협(床下義士)
29-10(0724) 전팽랑(田膨郞)
29-11(0725) 이귀수(李龜壽)
29-12(0726) 수레 안의 여자(車中女子)
29-13(0727) 최신사의 첩(崔愼思妾)
29-14(0728) 섭은낭(聶隱娘)
29-15(0729) 홍선(紅綫)
29-16(0730) 형십삼낭(荊十三娘)
권30 공거부(貢擧部) 씨족부(氏族部)
공거(貢擧)
30-1(0731) 진사과에 대한 총론(總叙進士科)
30-2(0732) 급제자 발표와 사은(放榜·謝恩)
30-3(0733) 제명(題名)
30-4(0734) 잡문 시험(試雜文)
30-5(0735) 내출제(內出題)
30-6(0736) 진사시가 예부로 귀속되다(進士歸禮部)
30-7(0737) 부해와 제주해(府解·諸州解)
30-8(0738) 채남사(蔡南史)
30-9(0739) 연집(宴集)
30-10(0740) 선종(宣宗)
30-11(0741) 두정현(杜正玄)
30-12(0742) 풍씨·장씨·양씨(馮氏·張氏·楊氏)
30-13(0743) 노악(盧渥)
30-14(0744) 최군(崔群)
30-15(0745) 잠분(湛賁)
30-16(0746) 조종(趙琮)
30-17(0747) 이고의 딸(李翱女)
30-18(0748) 이요(李堯)
30-19(0749) 정창도(鄭昌圖)
30-20(0750) 소장과 황우(蘇張·瑝嵎)
30-21(0751) 교이(喬彝)
30-22(0752) 이정(李程)
30-23(0753) 고식과 공승억(高湜·公乘億)
30-24(0754) 설보손(薛保遜)
30-25(0755) 상곤(常衮)
30-26(0756) 유태(劉蛻)
30-27(0757) 고비웅(顧非熊)
30-28(0758) 우석서(牛錫庶)
30-29(0759) 윤극(尹極)
30-30(0760) 두목(杜牧)
30-31(0761) 우승유(牛僧孺)
30-32(0762) 사공도(司空圖)
30-33(0763) 이고언(李固言)
30-34(0764) 장효표(章孝標)
30-35(0765) 이덕유(李德裕)
30-36(0766) 백민중(白敏中)
30-37(0767) 왕준과 정하(汪遵·程賀)
30-38(0768) 옹언추(翁彦樞)
30-39(0769) 양훤(楊暄)
30-40(0770) 최원한(崔元翰)
30-41(0771) 왕유(王維)
30-42(0772) 배사겸(裴思謙)
30-43(0773) 유분(劉蕡)
30-44(0774) 육의(陸扆)
30-45(0775) 왕인(王璘)
30-46(0776) 안표(顔摽)
30-47(0777) 송제와 온정균(宋濟·溫庭筠)
30-48(0778) 다섯 노인의 급제(五老榜)
30-49(0779) 반염(潘炎)
30-50(0780) 영호환(令狐峘)
30-51(0781) 장분(張濆)
30-52(0782) 노상경(盧尙卿)
씨족(氏族)
30-53(0783) 이씨(李氏)
30-54(0784) 왕씨(王氏)
30-55(0785) 칠성(七姓)
30-56(0786) 유례(類例)
책속으로
26-26(0672) 반언(潘彦)
[당나라] 함형(咸亨) 연간(670∼674)에 패주(貝州)의 반언은 쌍륙(雙陸)을 좋아해서 가는 곳마다 항상 쌍륙판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한번은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했는데, 오른손으로는 판자 하나를 잡고 왼손으로는 쌍륙판을 안고 입으로는 쌍륙 주사위를 물었다. 1박 2일 동안 표류한 끝에 해안에 이르렀는데, 두 손은 뼈가 드러날 정도였지만 쌍륙판은 끝내 놓지 않았으며 주사위도 입에 그대로 있었다.
27-15(0689) 순거백(荀巨伯)
순거백이 멀리 친구의 병문안을 하러 갔는데, 때마침 호적(胡賊)이 그 군(郡)을 공격했다. 친구가 순거백에게 말했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니 자네는 떠나는 게 좋겠네.”
그러자 순거백이 말했다.
“멀리 자네를 보러 왔는데, 지금 환난이 있다고 자네를 버리고 떠난다면 어찌 내가 행할 바이겠는가?”
호적이 당도하고 나서 순거백에게 말했다.
“대군이 여기에 밀어닥쳐 온 군이 텅 비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혼자 남아 있느냐?”
순거백이 말했다.
“친구가 병이 들어서 차마 버리고 떠날 수가 없으니, 차라리 내 몸으로 친구의 목숨을 대신하고자 한다.”
호적은 그를 남다르다고 여기면서 서로 말했다.
“우리처럼 의리 없는 사람이 의로운 나라에 잘못 들어왔구나.”
그러고는 공격을 멈추고 물러감으로써 온 군이 온전할 수 있었다. 미 : 호적도 칭찬할 만하다.
평 : 우정을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군(郡)도 보전할 수 있었으니 그 공덕이 크다.
30-1(0731) 진사과에 대한 총론(總叙進士科)
진사과는 수(隋)나라 대업(大業) 연간(605∼617)에 시작되었으며,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627∼649)과 영휘(永徽) 연간(650∼656) 무렵에 흥성했다. 벼슬아치 가운데 그 지위가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더라도 진사 출신이 아닌 자는 끝내 훌륭하다고 인정받지 못했다. 해마다 추천된 응시자가 늘 800∼900명을 밑돌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존중해서 “백의공경(白衣公卿)” 또는 “일품백삼(一品白衫)”이라 불렀으며, 진사시의 어려움을 두고 “서른 살이면 명경(明經)으로서는 늙었고, 쉰 살이면 진사로서는 젊다”라고 말했다. 제아무리 탁월한 재주와 변화의 이치에 통달한 법술, 소진(蘇秦)·장의(張儀) 같은 변설과 형가(荊軻)·섭정(聶政) 같은 담력, 중유(仲由 : 자로) 같은 무용(武勇)과 자방(子房 : 장양) 같은 계책, 홍양(弘羊 : 상홍양) 같은 산술(算術)과 방삭(方朔 : 동방삭) 같은 해학을 자부하더라도 모두 이것만으로는 이름을 드러낼 수 없다고 여겼다. 이들 가운데 과거 시험장에서 늙어 죽은 자도 있었지만 또한 한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미 : 과거 급제를 얘기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뽐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시가 있었다.
“태종(太宗) 황제께서 진정 훌륭한 계책 세우니, 얻은 영웅들 모두 백발이라네.”
그들이 모여서 시험 보는 곳을 “거장(擧場)”이라 하고, 응시자들을 통상 “수재(秀才)”라 칭하고, 명함을 보내는 것을 “향공(鄕貢)”이라 하고, 급제한 자를 “전진사(前進士)”라 하고, 서로 추숭하고 존경해 “선배(先輩)”라 하고, 함께 합격한 자를 “동년(同年)”이라 하고,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를 “좌주(座主)”라 하고, 경조부(京兆府)의 시험에서 선발되어 올라온 자를 “등제(等第)”라 하고, 외지의 주부(州府)에서 시험을 거치지 않고 추천된 자를 “발해(拔解)”라 하고, 시험 보기 전에 각자 서로를 보증해 주는 것을 “합보(合保)”라 하고, 함께 모여 기거하면서 시문을 짓는 것을 “사시(私試)”라 하고, 요직에 있는 권세가를 찾아가 청탁하는 것을 “관절(關節)”이라 하고, 명성을 드날리는 것을 “환왕(還往)”이라 하고, 이미 급제한 뒤에 이름을 자은사탑(慈恩寺塔)에 열거하는 것을 “제명(題名)”이라 한다. 곡강정자(曲江亭子)에서 열리는 성대한 연회를 “곡강회(曲江會)”라 하는데, 곡강회는 관시(關試) 후에 열리므로 또한 “문희연(聞喜宴)”이라고도 하고, 연회가 끝난 후에 동년들이 각자 갈 곳으로 떠나므로 또한 “이회(離會)”라고도 한다. 명적(名籍)에 등록하고 들어가 선발되는 것을 “춘위(春闈 : 예부시)”라 하고, 급제하지 못했지만 배불리 먹고 취하는 것을 “타모소(打毷氉)”라 하고, 이름을 숨긴 채 비방을 지어내는 것을 “무명자(無名子)”라 하고, 낙방하고 물러나 [도성에 머물면서] 학업을 계속하는 것을 “과하(過夏)”라 하고, 낙방한 뒤 학업을 닦으면서 시문을 써내는 것을 “하과(夏課)”라 하고, 책을 감춰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을 “서책(書策)”이라 한다. 이것이 진사과의 대략이다. 그 풍속은 학덕 있는 선배들에게 달렸고, 그 처리의 권한은 담당 관리에게 있었다.
평 : 당나라 말의 거인(舉人)들은 문예를 짓는 것을 따지지 않고 그저 요로의 인사를 배알하고 청탁하는 데에만 열심이었는데, 이를 “정절(精切)”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