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명나라 문학자 풍몽룡(馮夢龍)이 북송 초에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고대 소설 모음집인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원전이 되는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한대(漢代)부터 북송 초에 이르는 소설 · 필기 · 야사 등의 전적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광범위하게 채록해, 총 500권에 6965조로 정리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는 것처럼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다 담고 있다. 이 때문에 《태평광기》는 이후 역사서에 인용되기도 하고 후대의 문학 작품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파생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은 몇 가지 문제를 낳았다. 분량이 너무 많다 보니 인쇄도 쉽지 않고, 교정도 쉽지 않아 판본에 많은 오류가 발생했다. 더해서 독자들이 읽기에도 부담스러웠다. 풍몽룡은 《태평광기초》의 머리말인 〈소인(小引)〉에서 “옛사람은 고사를 인용할 때 출처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출처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큰 소리로 ‘《태평광기》에 나온다’라고 말했다. 그 권질이 방대해서 사람들이 열람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풍몽룡은 당시 부실한 《태평광기》 출판 상황을 개탄하면서 이대로 방치할 경우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결국 폐기될 것을 우려해, 보다 체계적이고 엄정하게 편집한 《태평광기》 선본을 간행하고자 했다. 이에 500권 92류(類)에 총 6965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던 《태평광기》 중 번잡하고 중복 수록된 고사를 삭제하고, 배치가 잘못된 것들을 정리해 전체 80권 82부(部)에 총 2584조의 고사로 편찬했다. 《태평광기》에 분리되어 수록되었던 고사를 《태평광기초》에서 병합한 고사가 400여 조이므로 실제로는 약 3000여 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는 셈이다.
《태평광기초》의 가장 큰 특징은 비주(批注)와 평어(評語)다. 비주는 지면의 상단 여백에 기록하는 미비(眉批), 고사의 원문 사이에 기록하는 협비(夾批)와 협주(夾注)가 있는데, 《태평광기초》에 기록된 미비는 1842개이고 협비와 협주는 269개다. 평어는 고사의 중간이나 말미에 해당 고사에 대한 풍몽룡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거나 해당 고사와 관련된 다른 고사를 인용해 논평한 것으로 218개에 달한다. 미비는 특정한 대목에 풍몽룡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밖에 부류를 설명하거나 어려운 글자에 대한 독음과 뜻을 설명한 경우도 있다. 협비와 협주는 고사의 중간중간에 풍몽룡의 즉흥적인 느낌을 기록한 경우가 가장 많으며, 그 밖에 특정한 인물·명물·사건에 대해 설명한 경우도 있다. 평어는 풍몽룡의 이성적 사고, 도덕적 가치관, 역사 인식, 인정세태에 대한 감회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비주와 평어는 풍몽룡의 사상과 가치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해당 고사를 읽는 독자들의 보다 흥미로운 감상과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돕는 아주 유용한 장치라고 하겠다.
이렇듯 《태평광기초》는 문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역사, 민속학적으로도 문헌적 가치가 무척 높은 필기 문헌이나,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아직 번역 성과가 없는 형편이다. 필기 문헌 전문 연구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는 세계 최초로 《태평광기초》를 번역, 교감, 주석해 완역 출간한다. 《태평광기초》의 원전 텍스트에 대한 보다 쉽고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삼아 이후 더욱 활발한 연구 성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200자평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고대 소설집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편찬한 설화집으로, 일명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고 한다. 전 500권의 이 방대한 이야기를 명나라 풍몽룡이 중복되는 것은 삭제하고 잘못 배치된 이야기는 정리해 80권으로 엮고 자신의 비평을 첨가한 책이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다. 내용이 재미있을 뿐 아니라, 중국 고전 소설 비평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중국 필기문학의 전문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가 세계 최초로 번역해 소개한다. 7권에는 인재 발탁에 대한 이야기인 권31 〈전선부(銓選部) 직관부(職官部)〉부터 사치와 탐욕, 인색함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권35 〈사치부(奢侈部) 탐부(貪部) 인부(吝部)〉까지를 수록했다.
엮은이
《태평광기초》를 평찬(評纂)한 풍몽룡(馮夢龍, 1574∼1646)은 중국 명나라 말의 문학자로, 자(字)는 유룡(猶龍)·공어(公魚)·자유(子猶)·이유(耳猶) 등이고, 호(號)는 향월거고곡산인(香月居顧曲散人)·고소사노(姑蘇詞奴)·오하사노(吳下詞奴)·전전거사(箋箋居士)·묵감재주인(墨憨齋主人)·전주주사(前周柱史)·녹천관주인(綠天官主人)·무원외사(茂苑外史)·평평각주인(平平閣主人) 등이다. 남직례(南直隸) 소주부(蘇州府) 장주현(長洲縣,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 사람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형 풍몽계(馮夢桂)와 동생 풍몽웅(馮夢熊)과 함께 “오하삼풍(吳下三馮)”으로 불렸다. 숭정(崇禎) 7년(1634)에 복건성(福建省) 수녕지현(壽寧知縣)을 지냈으며,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에 종사했다. 만년에는 반청(反淸) 운동에 가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근심과 울분 속에서 죽었다.
그는 명나라 최고의 통속 문학자로, 소설로는 가장 유명한 의화본 소설(擬話本小說)인 삼언(三言), 즉 《유세명언(喻世明言)》·《경세통언(警世通言)》·《성세항언(醒世恒言)》을 비롯해 《태평광기초》·《평요전(平妖傳)》·《열국지(列國志)》·《정사유략(情史類略)》 등을 편찬했고, 희곡으로는 《묵감재정본전기(墨憨齋定本傳奇)》, 민가집으로는 《산가(山歌)》·《괘지아(掛枝兒)》, 산곡(散曲)으로는 《태하신주(太霞新奏)》, 소화집(笑話集)으로는 《소부(笑府)》, 필기로는 《고금담개(古今譚槪)》·《지낭(智囊)》 등을 편찬했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민간 문학에 집중되어 있어서 통속 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옮긴이
김장환(金長煥)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남북조지인소설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교수(2004∼2005), 같은 대학교 페어뱅크 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객원교수(2011∼2012)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이다.
그동안 쓴 책으로 《중국 문학의 흐름》, 《중국 문학의 향기》, 《중국 문학의 향연》, 《중국 문언 단편 소설선》, 《유의경(劉義慶)과 세설신어(世說新語)》, 《위진세어 집석 연구(魏晉世語輯釋硏究)》, 《동아시아 이야기 보고의 탄생−태평광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 연극사》, 《중국 유서 개설(中國類書槪說)》, 《중국 역대 필기(中國歷代筆記)》, 《세상의 참신한 이야기−세설신어》(전 3권),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전 4권), 《세설신어 성휘운분(世說新語姓彙韻分)》(전 3권), 《태평광기(太平廣記)》(전 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 8권), 《봉신연의(封神演義)》(전 9권), 《당척언(唐摭言)》(전 2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고사전(高士傳)》, 《어림(語林)》, 《곽자(郭子)》, 《속설(俗說)》, 《담수(談藪)》, 《소설(小說)》, 《계안록(啓顔錄)》, 《신선전(神仙傳)》, 《옥호빙(玉壺氷)》, 《열이전(列異傳)》, 《제해기(齊諧記)·속제해기(續齊諧記)》, 《선험기(宣驗記)》, 《술이기(述異記)》, 《소림(笑林)·투기(妬記)》, 《고금주(古今注)》,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원혼지(寃魂志)》, 《이원(異苑)》, 《원화기(原化記)》, 《위진세어(魏晉世語)》, 《조야첨재(朝野僉載)》(전 2권),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전 2권)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에 관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있다.
차례
권31 전선부(銓選部) 직관부(職官部)
전선(銓選)
31-1(0787) 사장(謝莊)
31-2(0788) 고계보(高季輔)
31-3(0789) 적인걸과 장열(狄仁傑·張說)
31-4(0790) 이지원(李至遠)
31-5(0791) 노종원(盧從願)
31-6(0792) 정고(鄭杲)
31-7(0793) 석포충(石抱忠)
31-8(0794) 당교(唐皎)
31-9(0795) 사봉관(斜封官)
31-10(0796) 이름을 풀로 붙여 가리다(糊名)
31-11(0797) 정음과 최식(鄭愔·崔湜)
31-12(0798) 양국충(楊國忠)
31-13(0799) 이임보(李林甫)
31-14(0800) 배광정(裴光庭)
31-15(0801) 등갈(鄧渴)
31-16(0802) 이적지(李適之)
직관(職官)
31-17(0803) 재상에 대한 고찰(宰相考)
31-18(0804) 소괴(蘇瓌)
31-19(0805) 참작원(參酌院)
31-20(0806) 여온(呂溫)
31-21(0807) 이정(李程)
31-22(0808) 잡설(雜說)
31-23(0809) 오원(五院)
31-24(0810) 어사에 대한 고찰(御史考)
31-25(0811) 어사본초(御史本草)
31-26(0812) 어사에 대한 희학(御史謔)
31-27(0813) 평사가 어사대로 들어가다(評事入臺)
31-28(0814) 한고(韓皋)
31-29(0815) 상서성(尙書省)
31-30(0816) 최일지(崔日知)
31-31(0817) 상서성의 다리(省橋)
31-32(0818) 비서성(秘書省)
31-33(0819) 사청(莎廳)
권32 장수부(將帥部) 효용부(驍勇部)
장수(將帥)
32-1(0820) 이광필(李光弼)
32-2(0821) 마훈과 엄진(馬勛·嚴振)
32-3(0822) 온조(溫造)
32-4(0823) 고병(高騈)
32-5(0824) 장준(張濬)
32-6(0825) 장경(張勍)
효용(驍勇)
32-7(0826) 치구흔(甾丘訢)
32-8(0827) 임성왕(任城王)
32-9(0828) 환석건(桓石虔)
32-10(0829) 양대안(楊大眼)
32-11(0830) 맥철장(麥鐵杖)
32-12(0831) 팽낙(彭樂)
32-13(0832) 고개도와 두복위(高開道·杜伏威)
32-14(0833) 울지경덕 등(尉遲敬德等)
32-15(0834) 시소의 동생(柴紹弟)
32-16(0835) 가서한(哥舒翰)
32-17(0836) 신승사(辛承嗣)
32-18(0837) 이한지(李罕之)
32-19(0838) 송영문(宋令文)
32-20(0839) 팽박통(彭博通)
32-21(0840) 노신통(路神通)
32-22(0841) 왕절과 왕배우(汪節·王俳優)
32-23(0842) 묵군화(墨君和)
권33 편급부(褊急部) 혹포부(酷暴部)
편급(褊急)
33-1(0843) 시묘(時苗)
33-2(0844) 왕사(王思)
33-3(0845) 이응도(李凝道)
33-4(0846) 황보식(皇甫湜)
33-5(0847) 이반(李潘)
33-6(0848) 왕공(王珙)
혹포(酷暴)
33-7(0849) 마추(麻秋)
33-8(0850) 주찬 등(朱粲等)
33-9(0851) 이희열(李希烈)
33-10(0852) 독고장(獨孤莊)
33-11(0853) 무승사(武承嗣)
33-12(0854) 학상현(郝象賢)
33-13(0855) 주흥(周興)
33-14(0856) 내준신(來俊臣)
33-15(0857) 왕홍의(王弘義)
33-16(0858) 색원례(索元禮)
33-17(0859) 삼표(三豹)
33-18(0860) 사우(謝祐)
33-19(0861) 성왕 이천리(成王千里)
33-20(0862) 양양의 표본 절도사(襄樣節度)
33-21(0863) 사모(史牟)
33-22(0864) 안도진(安道進)
권34 권행부(權幸部) 첨녕부(諂佞部)
권행(權幸)
34-1(0865) 장역지 형제(張易之兄弟)
34-2(0866) 괵국부인(虢國夫人)
34-3(0867) 왕준(王準)
34-4(0868) 이임보(李林甫)
34-5(0869) 어조은(魚朝恩)
34-6(0870) 원재(元載)
34-7(0871) 노암(路岩)
34-8(0872) 팔사마와 십사호(八司馬·十司戶)
첨녕(諂佞)
34-9(0873) 조원해(趙元楷)
34-10(0874) 이교(李嶠)
34-11(0875) 주흥과 부유예(周興·傅游藝)
34-12(0876) 곽패(郭霸)
34-13(0877) 고원례(高元禮)
34-14(0878) 종초객과 장급(宗楚客·張岌)
34-15(0879) 최융 등(崔融等)
34-16(0880) 길욱(吉頊)
34-17(0881) 장열(張說)
34-18(0882) 정백헌(程伯獻)
34-19(0883) 이임보(李林甫)
34-20(0884) 이장(李璋)
34-21(0885) 풍도명(馮道明)
34-22(0886) 장준(張浚)
34-23(0887) 이덕유(李德裕)
34-24(0888) 왕승휴(王承休)
권35 사치부(奢侈部) 탐부(貪部) 인부(吝部)
사치(奢侈)
35-1(0889) 운명대와 시황묘(雲明臺·始皇墓)
35-2(0890) 한 성제(漢成帝)
35-3(0891) 한 영제(漢靈帝)
35-4(0892) 제야(除夜)
35-5(0893) 당 예종(唐睿宗)
35-6(0894) 현종(玄宗)
35-7(0895) 하간왕 원침(河間王琛)
35-8(0896) 안락 공주(安樂公主)
35-9(0897) 동창 공주(同昌公主)
35-10(0898) 곽황(郭况)
35-11(0899) 곽광의 처(霍光妻)
35-12(0900) 한언(韓嫣)
35-13(0901) 허경종(許敬宗)
35-14(0902) 아장(阿臧)
35-15(0903) 위척(韋陟)
35-16(0904) 원재(元載)
35-17(0905) 양수(楊收)
35-18(0906) 우적과 이창기(于頔·李昌夔)
35-19(0907) 왕애(王涯)
35-20(0908) 이덕유(李德裕)
35-21(0909) 이 사군(李使君)
35-22(0910) 원광한(袁廣漢)
탐(貪)
35-23(0911) 배길의 고모부(裴佶姑夫)
35-24(0912) 엄승기(嚴升期)
35-25(0913) 하후표지(夏侯彪之)
35-26(0914) 왕지음(王志愔)
35-27(0915) 장연상(張延賞)
35-28(0916) 왕웅(王熊)
35-29(0917) 정인개(鄭仁凱)
35-30(0918) 위공간(韋公幹)
35-31(0919) 용창예(龍昌裔)
35-32(0920) 안중패(安重霸)
35-33(0921) 장건쇠(張虔釗)
35-34(0922) 영남의 군목(嶺南郡牧)
치생(治生) 부(附)
35-35(0923) 배명례(裴明禮)
35-36(0924) 두예(杜乂)
인(吝)
35-37(0925) 심준(沈峻)
35-38(0926) 이숭(李崇)
35-39(0927) 하후처신 등(夏侯處信等)
35-40(0928) 유숭귀(劉崇龜)
35-41(0929) 왕악(王鍔)
35-42(0930) 배거(裴璩)
35-43(0931) 귀등(歸登)
책속으로
31-4(0790) 이지원(李至遠)
[당나라] 여의(如意) 원년(692)에 천관낭중(天官郞中 : 이부낭중) 이지원은 임시로 시랑(侍郞)의 일을 맡고 있었다. 당시 관리 선발 대기자 중에 성이 조(刁)인 사람과 왕원충(王元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임용에서 탈락되었다. 그러자 이들은 은밀히 영사(令史)와 짜고 성의 점과 획을 지워서 조(刁)를 정(丁)으로 고치고 왕(王)을 사(士)로 고쳤다가, 관직을 받은 후에 점획을 더해서 원래대로 만들려고 했다. 이지원은 명단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리고 말했다.
“올해 만 명을 전형하면서 그들의 성명을 모두 알고 있는데, 어디에 정씨와 사씨가 있었던가? 이것은 조 아무개와 왕 아무개다.”
상서성(尙書省)에서는 그를 귀신처럼 총명하다고 여겼다.
33-4(0846) 황보식(皇甫湜)
[당나라의] 배도(裴度)가 낙양(洛陽)을 편안하게 다스리고 있을 때 황보식을 종사(從事)로 초징했다. 황보식은 거침없이 객기를 부렸지만 배도는 매번 그를 너그럽게 포용했다. 배도는 불교를 믿었는데 자신이 회서(淮西) 지방을 토벌할 때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재앙이 미칠까 염려해서, 아주 장엄하고 화려하게 복선사(福先寺)를 중수했다. 불사가 완공되는 날이 다가오자 배도는 백거이(白居易)에게 편지를 보내 비문을 써 달라고 청하려 했다. 황보식이 그 자리에 있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가까이 있는 저를 놔두고 멀리 있는 백거이를 부르신 것은 제가 뭔가 잘못을 한 게 분명하니, 작별 인사를 드리고 물러가길 청합니다.”
빈객 중에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배도가 부드러운 말로 사과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감히 번거롭게 부탁하지 못했던 것은 대문호에게 거절당할까 봐 걱정해서였는데, 지금 이미 그러하다면 그건 내가 원하던 바요.” 미 : 배도는 정말로 도량이 크다.
황보식은 화가 조금 누그러지자 술 한 말을 달라고 해서 돌아가더니, 집에 도착해서 혼자 그 절반을 마신 다음 술기운을 빌려 붓을 휘둘렸는데, 금세 문장이 완성되었다. 다음 날 황보식은 다시 깨끗이 써서 배도에게 바쳤다. 그 문장은 뜻이 매우 예스럽고 글자 또한 괴벽했다. 배도는 한참 동안 궁리해 보았지만 그 구두를 나눌 수 없자 감탄하며 말했다.
“[옛날 진(晉)나라의] 목현허[木玄虛 : 목화(木華)]나 곽경순[郭景純 : 곽박(郭璞)]의 무리로다!”
그러고는 값비싼 수레와 명마에 비단과 노리개 등 1000여 민(緡 : 1민은 1000냥)의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을 편지와 함께 그의 집으로 하급 장교를 보내 사례했다. 그러나 황보식은 편지를 보고 크게 화를 내더니 땅에 편지를 던지면서 하급 장교에게 말했다.
“시중(侍中 : 배도)께 말씀 전해 주게. 어찌 이렇게 야박하게 대우할 수 있는가? 내 글은 일반 무리의 글이 아니네. 나는 일찍이 고황(顧况)의 문집에 서문을 지어 준 것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글을 써 준 적이 없네. 이번에 그 비문을 쓰겠다고 청한 것은 그간 받은 은혜가 매우 두터웠기 때문이네. 하지만 비문의 글자가 약 3000자인데, 한 자당 비단 세 필씩이며 여기서 한 푼도 깎을 수 없네.”
하급 장교가 걱정하고 화를 내면서 돌아가서 황보식의 말을 자세히 고했더니, 막료들이 모두 분해하면서 그의 살점을 저며 죽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배도는 웃으며 말했다.
“진정 기재(奇才)로다!”
그러고는 즉시 황보식이 원하는 액수대로 다시 사례했다. 유수부(留守府 : 배도의 관부)에서부터 정랑(正郞 : 황보식)의 집까지 사례품을 실은 수레가 이어졌는데, 낙양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니 마치 옹수(雍水)와 강수(絳水)에서 배 띄우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황보식은 사례품을 받으면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황보식의 편협하고 급한 성질은 정말 유별났다. 그가 한번은 벌에 손가락을 쐬었는데, 몹시 조급하게 화를 내며 좋은 값으로 널리 벌집을 사들인 후에 그것을 짓이겨 진액을 짜내게 함으로써 자기의 아픔을 갚았다. 또 한번은 아들 황보송(皇甫松)에게 시 몇 수를 베껴 적게 했는데, 한 글자를 조금 틀리자 펄펄 뛰며 욕을 퍼부으면서 손에 막대기가 잡히지 않자 피가 흐르도록 아들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35-6(0894) 현종(玄宗)
[당나라] 현종은 화청궁(華淸宮)에 행차해 온천탕 하나를 새로 넓혀 웅장하고 화려하게 축조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안녹산(安祿山)은 범양(范陽)에서 백옥석(白玉石)으로 물고기·용·오리·기러기를 만들고 또 돌다리와 돌연꽃을 만들어 바쳤는데, 그 조각한 솜씨가 너무 정교해서 거의 사람이 만든 게 아닌 듯했다.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그 기물들을 온천탕 안에 진열하라고 명했으며, 또한 돌다리를 온천탕 위에 걸쳐 놓고 돌연꽃을 물가에서 갓 피어나는 것처럼 배치하라고 했다. 현종은 화청궁에 행차해 그곳에 이르러 옷을 벗고 들어가려 했는데, 물고기·용·오리·기러기 조각이 모두 비늘을 떨치고 날개를 펼치면서 마치 살아서 날아 움직일 듯했기에, 현종은 몹시 두려워서 급히 그것들을 치우라고 명했다. 그래서 돌연꽃과 돌다리만 남아 있다. 현종이 또 한번은 화청궁에 수십 칸이나 되는 장탕옥(長湯屋)을 만들어 그 둘레를 무늬 돌로 꾸몄으며, 은을 상감해 옻칠한 배와 백향목(白香木)으로 만든 배를 그 안에 띄웠는데, 노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옥으로 장식했다. 또 온천탕 안에는 벽옥(碧玉)과 침향(沉香)을 쌓아 산을 만들어 영주산(瀛洲山)과 방장산(方丈山)처럼 꾸며 놓았다. 현종이 화청궁에 행차하려 하자, 양귀비(楊貴妃) 자매는 다투어 거복(車服)을 장식해 독거(犢車) 한 대를 황금과 비취로 장식하고 주옥을 섞어 넣었는데, 수레 한 대를 치장하는 데 들어간 비용이 수십만 관(貫 : 1관은 1000냥)을 훨씬 넘었다. 그러나 치장한 수레가 너무 무거워서 소가 끌 수 없었다. 그래서 양귀비 자매는 다시 현종에게 아뢰어 각자 말을 타고 가겠다고 청한 뒤, 다투어 명마를 사서 황금으로 재갈을 만들고 수놓은 비단으로 장니(障泥)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함께 양국충(楊國忠)의 저택에 모였다가 같이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그 성대한 행차가 번쩍번쩍 빛났으며 구경꾼들이 담을 두른 것처럼 많았다. 양국충의 저택에서 도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마부와 거마(車馬)들로 그 사이가 시끌벅적했다. 양국충은 손님과 함께 집에 앉아 있다가 그 행차를 가리키며 손님에게 말했다.
“우리 집안은 한미(寒微)한 출신이지만, 초방(椒房 : 황후의 거처로 양귀비를 말함)의 친척이 되었기에 이러한 정도에까지 이르렀소. 나는 지금도 내가 쉬게 될 자리를 알지 못하고 결국 훌륭한 명성을 이룰 수 없을까 걱정하지만, 그래도 모름지기 부귀함에서 즐거움을 취할 따름이오.”
이로 말미암아 양씨 집안은 교만하고 사치를 부리는 작태가 날로 더했으며 그러면서도 늘 부족한 것처럼 했다. 세상에 전해지는 태평 공주(太平公主)의 옥엽관(玉葉冠)과 괵국부인(虢國夫人 : 양귀비의 언니)의 야광침(夜光枕)과 양국충의 쇄자장(鎖子帳 : 보석을 쇠사슬 모양으로 장식한 휘장)은 모두 세상에 드문 보물로 그 값을 따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