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명나라 문학자 풍몽룡(馮夢龍)이 북송 초에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고대 소설 모음집인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원전이 되는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한대(漢代)부터 북송 초에 이르는 소설 · 필기 · 야사 등의 전적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광범위하게 채록해, 총 500권에 6965조로 정리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는 것처럼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다 담고 있다. 이 때문에 《태평광기》는 이후 역사서에 인용되기도 하고 후대의 문학 작품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파생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은 몇 가지 문제를 낳았다. 분량이 너무 많다 보니 인쇄도 쉽지 않고, 교정도 쉽지 않아 판본에 많은 오류가 발생했다. 더해서 독자들이 읽기에도 부담스러웠다. 풍몽룡은 《태평광기초》의 머리말인 〈소인(小引)〉에서 “옛사람은 고사를 인용할 때 출처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출처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큰 소리로 ‘《태평광기》에 나온다’라고 말했다. 그 권질이 방대해서 사람들이 열람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풍몽룡은 당시 부실한 《태평광기》 출판 상황을 개탄하면서 이대로 방치할 경우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결국 폐기될 것을 우려해, 보다 체계적이고 엄정하게 편집한 《태평광기》 선본을 간행하고자 했다. 이에 500권 92류(類)에 총 6965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던 《태평광기》 중 번잡하고 중복 수록된 고사를 삭제하고, 배치가 잘못된 것들을 정리해 전체 80권 82부(部)에 총 2584조의 고사로 편찬했다. 《태평광기》에 분리되어 수록되었던 고사를 《태평광기초》에서 병합한 고사가 400여 조이므로 실제로는 약 3000여 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는 셈이다.
《태평광기초》의 가장 큰 특징은 비주(批注)와 평어(評語)다. 비주는 지면의 상단 여백에 기록하는 미비(眉批), 고사의 원문 사이에 기록하는 협비(夾批)와 협주(夾注)가 있는데, 《태평광기초》에 기록된 미비는 1842개이고 협비와 협주는 269개다. 평어는 고사의 중간이나 말미에 해당 고사에 대한 풍몽룡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거나 해당 고사와 관련된 다른 고사를 인용해 논평한 것으로 218개에 달한다. 미비는 특정한 대목에 풍몽룡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밖에 부류를 설명하거나 어려운 글자에 대한 독음과 뜻을 설명한 경우도 있다. 협비와 협주는 고사의 중간중간에 풍몽룡의 즉흥적인 느낌을 기록한 경우가 가장 많으며, 그 밖에 특정한 인물·명물·사건에 대해 설명한 경우도 있다. 평어는 풍몽룡의 이성적 사고, 도덕적 가치관, 역사 인식, 인정세태에 대한 감회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비주와 평어는 풍몽룡의 사상과 가치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해당 고사를 읽는 독자들의 보다 흥미로운 감상과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돕는 아주 유용한 장치라고 하겠다.
이렇듯 《태평광기초》는 문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역사, 민속학적으로도 문헌적 가치가 무척 높은 필기 문헌이나,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아직 번역 성과가 없는 형편이다. 필기 문헌 전문 연구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는 세계 최초로 《태평광기초》를 번역, 교감, 주석해 완역 출간한다. 《태평광기초》의 원전 텍스트에 대한 보다 쉽고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삼아 이후 더욱 활발한 연구 성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200자평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고대 소설집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편찬한 설화집으로, 일명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고 한다. 전 500권의 이 방대한 이야기를 명나라 풍몽룡이 중복되는 것은 삭제하고 잘못 배치된 이야기는 정리해 80권으로 엮고 자신의 비평을 첨가한 책이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다. 내용이 재미있을 뿐 아니라, 중국 고전 소설 비평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중국 필기문학의 전문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가 세계 최초로 번역해 소개한다. 8권에는 잘못을 지적하고 비웃는 권36 〈유오부(謬誤部) 유망부(遺忘部) 치비부(嗤鄙部)〉부터 각종 요사스러움과 무당을 다룬 권40 〈요망부(妖妄部) 무부(巫部)〉까지를 수록했다.
엮은이
《태평광기초》를 평찬(評纂)한 풍몽룡(馮夢龍, 1574∼1646)은 중국 명나라 말의 문학자로, 자(字)는 유룡(猶龍)·공어(公魚)·자유(子猶)·이유(耳猶) 등이고, 호(號)는 향월거고곡산인(香月居顧曲散人)·고소사노(姑蘇詞奴)·오하사노(吳下詞奴)·전전거사(箋箋居士)·묵감재주인(墨憨齋主人)·전주주사(前周柱史)·녹천관주인(綠天官主人)·무원외사(茂苑外史)·평평각주인(平平閣主人) 등이다. 남직례(南直隸) 소주부(蘇州府) 장주현(長洲縣,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 사람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형 풍몽계(馮夢桂)와 동생 풍몽웅(馮夢熊)과 함께 “오하삼풍(吳下三馮)”으로 불렸다. 숭정(崇禎) 7년(1634)에 복건성(福建省) 수녕지현(壽寧知縣)을 지냈으며,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에 종사했다. 만년에는 반청(反淸) 운동에 가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근심과 울분 속에서 죽었다.
그는 명나라 최고의 통속 문학자로, 소설로는 가장 유명한 의화본 소설(擬話本小說)인 삼언(三言), 즉 《유세명언(喻世明言)》·《경세통언(警世通言)》·《성세항언(醒世恒言)》을 비롯해 《태평광기초》·《평요전(平妖傳)》·《열국지(列國志)》·《정사유략(情史類略)》 등을 편찬했고, 희곡으로는 《묵감재정본전기(墨憨齋定本傳奇)》, 민가집으로는 《산가(山歌)》·《괘지아(掛枝兒)》, 산곡(散曲)으로는 《태하신주(太霞新奏)》, 소화집(笑話集)으로는 《소부(笑府)》, 필기로는 《고금담개(古今譚槪)》·《지낭(智囊)》 등을 편찬했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민간 문학에 집중되어 있어서 통속 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옮긴이
김장환(金長煥)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남북조지인소설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교수(2004∼2005), 같은 대학교 페어뱅크 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객원교수(2011∼2012)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이다.
그동안 쓴 책으로 《중국 문학의 흐름》, 《중국 문학의 향기》, 《중국 문학의 향연》, 《중국 문언 단편 소설선》, 《유의경(劉義慶)과 세설신어(世說新語)》, 《위진세어 집석 연구(魏晉世語輯釋硏究)》, 《동아시아 이야기 보고의 탄생−태평광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 연극사》, 《중국 유서 개설(中國類書槪說)》, 《중국 역대 필기(中國歷代筆記)》, 《세상의 참신한 이야기−세설신어》(전 3권),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전 4권), 《세설신어 성휘운분(世說新語姓彙韻分)》(전 3권), 《태평광기(太平廣記)》(전 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 8권), 《봉신연의(封神演義)》(전 9권), 《당척언(唐摭言)》(전 2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고사전(高士傳)》, 《어림(語林)》, 《곽자(郭子)》, 《속설(俗說)》, 《담수(談藪)》, 《소설(小說)》, 《계안록(啓顔錄)》, 《신선전(神仙傳)》, 《옥호빙(玉壺氷)》, 《열이전(列異傳)》, 《제해기(齊諧記)·속제해기(續齊諧記)》, 《선험기(宣驗記)》, 《술이기(述異記)》, 《소림(笑林)·투기(妬記)》, 《고금주(古今注)》,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원혼지(寃魂志)》, 《이원(異苑)》, 《원화기(原化記)》, 《위진세어(魏晉世語)》, 《조야첨재(朝野僉載)》(전 2권),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전 2권)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에 관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있다.
차례
권36 유오부(謬誤部) 유망부(遺忘部) 치비부(嗤鄙部)
유오(謬誤)
36-1(0932) 감자포(甘子布)
36-2(0933) 소영사(蕭穎士)
36-3(0934) 치앙(郗昂)
36-4(0935) 장 장사(張長史)
36-5(0936) 소부(蕭俛)
36-6(0937) 최청(崔淸)
36-7(0938) 강서의 역참 관리(江西驛官)
36-8(0939) 곽무정(郭務靜)
36-9(0940) 이문례(李文禮)
36-10(0941) 장수신(張守信)
36-11(0942) 원주(苑䛆)
36-12(0943) 도성의 유생(京都儒士)
36-13(0944) 두소경(竇少卿)
36-14(0945) 하유량(何儒亮)
36-15(0946) 와전된 말(語訛)
유망(遺忘)
36-16(0947) 장이섭(張利涉)
36-17(0948) 염현일(閻玄一)
36-18(0949) 이원효(李元皛)
치비(嗤鄙)
36-19(0950) 전욱(顓頊)
36-20(0951) 준치(蹲鴟)
36-21(0952) 한창(韓昶)
36-22(0953) 한간(韓簡)
36-23(0954) 장유고(張由古)
36-24(0955) 탁지랑(度支郞)
36-25(0956) 권용양(權龍襄)
36-26(0957) 사사명(史思明)
36-27(0958) 최숙청(崔叔淸)
36-28(0959) 상정종(常定宗)
36-29(0960) 장회경(張懷慶)
36-30(0961) 매권형(梅權衡)
36-31(0962) 유의방(劉義方)
36-32(0963) 이거(李據)
36-33(0964) 소미도(蘇味道)
36-34(0965) 후사지(侯思止)
36-35(0966) 왕급선과 양도(王及善·陽滔)
36-36(0967) 세 가지 더러움(三穢)
36-37(0968) 대성 안의 말(臺中語)
36-38(0969) 왕초 형제(王初昆弟)
36-39(0970) 내자순(來子珣)
36-40(0971) 무의종(武懿宗)
36-41(0972) 조인장(趙仁獎)
36-42(0973) 숙종 때 초징된 인재(肅宗朝徵君)
36-43(0974) 임곡(任轂)
36-44(0975) 소응현의 서생(昭應書生)
36-45(0976) 장 박사(張博士)
36-46(0977) 세 명의 망령된 사람(三妄人)
36-47(0978) 정계(鄭綮)
36-48(0979) 여간(黎幹)
36-49(0980) 광주의 남쪽(廣南)
36-50(0981) 강변(康)
36-51(0982) 원수일(袁守一)
36-52(0983) 장현정(張玄靖)
36-53(0984) 최함(崔咸)
36-54(0985) 두풍(杜豐)
36-55(0986) 독고수충(獨孤守忠)
36-56(0987) 손언고(孫彦高)
36-57(0988) 호씨 현령(胡令)
36-58(0989) 설창서(薛昌緖)
36-59(0990) 장함광(張咸光)
36-60(0991) 긴 수염의 승려(長鬚僧)
권37 경박부(輕薄部) 조초부(嘲誚部)
경박(輕薄)
37-1(0992) 요표(姚彪)
37-2(0993) 사영운(謝靈運)
37-3(0994) 유효작(劉孝綽)
37-4(0995) 두심언 부자(杜審言父子)
37-5(0996) 양형(楊炯)
37-6(0997) 은안(殷安)
37-7(0998) 설능(薛能)
37-8(0999) 설보손 부자(薛保遜父子)
37-9(1000) 소영사(蕭穎士)
37-10(1001) 진통방(陳通方)
37-11(1002) 정광업(鄭光業)
37-12(1003) 가영(賈泳)
37-13(1004) 나은(羅隱)
37-14(1005) 풍연(馮涓)
37-15(1006) 이군옥(李群玉)
37-16(1007) 최소부(崔昭符)
37-17(1008) 온정(溫定)
37-18(1009) 남탁(南卓)
37-19(1010) 고봉휴(高逢休)
37-20(1011) 봉순경(封舜卿)
37-21(1012) 요암걸(姚巖傑)
조초(嘲誚)
37-22(1013) 변소(邊韶)
37-23(1014) 하순(賀循)
37-24(1015) 조사언(祖士言)
37-25(1016) 고상(高爽)
37-26(1017) 설종(薛綜)
37-27(1018) 서지재(徐之才)
37-28(1019) 마씨·왕씨와 감흡(馬王·甘洽)
37-29(1020) 적인걸(狄仁傑)
37-30(1021) 노사도(盧思道)
37-31(1022) 설도형(薛道衡)
37-32(1023) 우세기(虞世基)
37-33(1024) 내항(來恒)
37-34(1025) 구양순(歐陽詢)
37-35(1026) 진희민(陳希閔)
37-36(1027) 이상(李詳)
37-37(1028) 신단(辛亶)
37-38(1029) 우홍(牛弘)
37-39(1030) 고사렴(高士廉)
37-40(1031) 배약(裴略)
37-41(1032) 강회(姜晦)
37-42(1033) 조숭(趙崇)
37-43(1034) 송제(宋濟)
37-44(1035) 어사이행(御史裏行)
37-45(1036) 장원일 등(張元一等)
37-46(1037) 황번작(黃幡綽)
37-47(1038) 피일휴(皮日休)
37-48(1039) 설능(薛能)
37-49(1040) 이 주부(李主簿)
37-50(1041) 봉포일(封抱一)
37-51(1042) 최애(崔涯)
37-52(1043) 이선고(李宣古)
37-53(1044) 두목(杜牧)
37-54(1045) 정계명(程季明)
37-55(1046) 왕유(王維)
37-56(1047) 교임(喬琳)
37-57(1048) 이경현(李敬玄)
37-58(1049) 최신유(崔愼由)
37-59(1050) 당오경(唐五經)
37-60(1051) 청룡사의 객(靑龍寺客)
37-61(1052) 곽소(郭素)
37-62(1053) 요계(姚洎)
37-63(1054) 비단 짜는 사람(織錦人)
권38 회해부(詼諧部)
회해(詼諧)
38-1(1055) 안영(晏嬰)
38-2(1056) 원차양(袁次陽)
38-3(1057) 이적(伊籍)
38-4(1058) 제갈각(諸葛恪)
38-5(1059) 등애(鄧艾)
38-6(1060) 채모(蔡謨)
38-7(1061) 제갈회(諸葛恢)
38-8(1062) 학륭(郝隆)
38-9(1063) 장융(張融)
38-10(1064) 하승천(何承天)
38-11(1065) 하욱(何勗)
38-12(1066) 유회(劉繪)
38-13(1067) 서효사(徐孝嗣)
38-14(1068) 심소략(沈昭略)
38-15(1069) 호해지(胡諧之)
38-16(1070) 서릉(徐陵)
38-17(1071) 양 무제(梁武)
38-18(1072) 스님 중공(僧重公)
38-19(1073) 손소(孫紹)
38-20(1074) 북위 저잣거리의 사람(魏市人)
38-21(1075) 위언연(魏彦淵)
38-22(1076) 이서(李庶)
38-23(1077) 노순조(盧詢祖)
38-24(1078) 북해의 왕희(北海王晞)
38-25(1079) 서지재(徐之才)
38-26(1080) 후백(侯伯)
38-27(1081) 수나라의 말 더듬는 사람(隋朝吃人)
38-28(1082) 유작(劉焯)
38-29(1083) 장손무기(長孫無忌)
38-30(1084) 장손현동(長孫玄同)
38-31(1085) 허경종(許敬宗)
38-32(1086) 고최외(高崔嵬)
38-33(1087) 배현본(裴玄本)
38-34(1088) 임괴(任瓌)
38-35(1089) 배담(裴談)
38-36(1090) 이진악(李鎭惡)
38-37(1091) 노이(盧廙)
38-38(1092) 송수(松壽)
38-39(1093) 두연업(杜延業)
38-40(1094) 조겸광(趙謙光)
38-41(1095) 유조하(劉朝霞)
38-42(1096) 배도(裴度)
38-43(1097) 요현(姚峴)
38-44(1098) 주원(周願)
38-45(1099) 육장원(陸長源)
38-46(1100) 원덕사(袁德師)
38-47(1101) 양우경(楊虞卿)
38-48(1102) 심아지(沈亞之)
38-49(1103) 소미도(蘇味道)
38-50(1104) 장호(張祜)
38-51(1105) 교주와 광주의 유람객(交廣客)
38-52(1106) 양무직(楊茂直)
38-53(1107) 노조와 정능(盧肇·丁棱)
38-54(1108) 이환(李寰)
38-55(1109) 배휴(裴休)
38-56(1110) 공위(孔緯)
38-57(1111) 우문한(宇文翰)
38-58(1112) 왕탁(王鐸)
38-59(1113) 노연양(盧延讓)
38-60(1114) 고형(顧夐)
38-61(1115) 석동통(石動筒)
38-62(1116) 황번작(黃繙綽)
38-63(1117) 이가급(李可及)
38-64(1118) 안비신(安轡新)
38-65(1119) 목조릉(穆刁綾)
38-66(1120) 호찬(胡趲)
권39 휼지부(譎智部) 궤사부(詭詐部) 무뢰부(無賴部)
휼지(譎智)
39-1(1121) 위 태조(魏太祖)
39-2(1122) 진 명제(晉明帝)
39-3(1123) 최사긍(崔思兢)
39-4(1124) 유현좌(劉玄佐)
39-5(1125) 이포정(李抱貞)
39-6(1126) 마 태수(馬太守)
39-7(1127) 진무의 씨름군(振武角抵人)
궤사(詭詐)
39-8(1128) 곽순과 왕수(郭純·王燧)
39-9(1129) 고양이와 앵무새를 길들이다(調猫兒鸚鵡)
39-10(1130) 당동태와 호연경(唐同泰·胡延慶)
39-11(1131) 측천무후의 상서로운 징조(則天禎祥)
39-12(1132) 스님 호초(胡超僧)
39-13(1133) 안녹산(安祿山)
39-14(1134) 이임보(李林甫)
39-15(1135) 한전회(韓全誨)
39-16(1136) 이경원(李慶遠)
39-17(1137) 장호(張祜)
39-18(1138) 대안사(大安寺)
39-19(1139) 배현지(裴玄智)
39-20(1140) 성도의 걸인(成都丐者)
39-21(1141) 설씨의 아들(薛氏子)
39-22(1142) 진중의 젊은이(秦中子)
무뢰(無賴)
39-23(1143) 한영규(韓令珪)
39-24(1144) 왕 사군(王使君)
39-25(1145) 이 수재(李秀才)
39-26(1146) 성이 엄씨인 사람(姓嚴人)
39-27(1147) 곽헌가(霍獻可)
39-28(1148) 송지손(宋之愻)
39-29(1149) 악종훈(樂從訓)
39-30(1150) 팽선각과 장덕(彭先覺·張德)
39-31(1151) 사리를 삼킨 선비(士子呑舍利)
39-32(1152) 장간 등(張幹等)
39-33(1153) 촉 사람 조고와 위소경(蜀趙高·韋少卿)
39-34(1154) 형주의 문신한 자(荊州札者)
39-35(1155) 한신(韓伸)
권40 요망부(妖妄部) 무부(巫部)
요망(妖妄)
40-1(1156) 채탄(蔡誕)
40-2(1157) 수만경(須曼卿)
40-3(1158) 강무 선생(姜撫先生)
40-4(1159) 장안의 도사(長安道士)
40-5(1160) 설회의(薛懷義)
40-6(1161) 송자현(宋子賢)
40-7(1162) 유용자와 백철여(劉龍子·白鐵余)
40-8(1163) 후원(侯元)
40-9(1164) 공덕산(功德山)
40-10(1165) 한차(韓佽)
40-11(1166) 호승(胡僧)
40-12(1167) 진 복야(陳僕射)
40-13(1168) 유원형(劉元逈)
40-14(1169) 여용지와 제갈은 등(呂用之·諸葛殷等)
40-15(1170) 낙빈왕(駱賓王)
40-16(1171) 동창(董昌)
무(巫)
40-17(1172) 무당 서례(師舒禮)
40-18(1173) 적유겸(狄惟謙)
40-19(1174) 하파와 내파(何婆·來婆)
40-20(1175) 아마파(阿馬婆)
40-21(1176) 위근(韋覲)
40-22(1177) 이항(李恒)
40-23(1178) 엽주법(厭咒法)
책속으로
36-8(0939) 곽무정(郭務靜)
당(唐)나라의 창주(滄州) 남피현승(南皮縣丞) 곽무정이 처음 부임했을 때, 통판(通判) 왕경(王慶)이 사건을 처리하고 있자 곽무정이 말했다.
“그대는 성이 무엇인가?”
왕경이 말했다.
“왕씨(王氏)입니다.”
잠시 뒤에 왕경이 다시 오자 곽무정이 또 성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왕경이 다시 말했다.
“왕씨입니다.”
그러자 곽무정은 한참 동안 이상해하고 놀라면서 왕경을 쳐다보며 말했다.
“남피의 좌사(佐史)들은 모두 왕씨인가?”
곽무정은 본디 흐리멍덩했는데, 주부(主簿) 유사장(劉思莊)과 함께 객점에 투숙했을 때 유사장에게 말했다.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일은 정말 어렵네. 내가 한번은 어가를 수행하다가 식구를 사흘 동안 잃어버렸는데 시종관의 장막에서 찾아냈네.”
유사장이 말했다.
“공의 부인이 그 안에 있었습니까?”
곽무정이 말했다.
“만약 그 안에 있지 않았다면 다시 무슨 일을 논하겠는가?”
곽무정이 또 유사장에게 말했다.
“요즘은 도둑이 정말 많네. 어젯밤 2경 후에 내가 밖에서 들어오다 보니 한 도둑이 갑자기 내 방 안에서 도망쳐 나오더군.”
유사장이 말했다.
“어떤 물건을 잃어버렸습니까?”
곽무정이 말했다.
“없네.”
유사장이 말했다.
“물건을 잃어버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도둑인지 아십니까?”
곽무정이 말했다.
“그놈이 허둥대며 도망가는 것만 봐도 의심을 피할 수 없지.”
36-45(0976) 장 박사(張博士)
당(唐)나라의 한완(韓琬)과 장창종(張昌宗)·왕본립(王本立)은 함께 태학(太學)에서 수학했다. 성이 장씨(張氏)인 태학박사는 장창종의 당숙이었는데, 오경(五經)에는 정통했으나 세상일에는 어두웠다. 그는 닭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 닭을 “발 공자(勃公子)”라고 부르며 끔찍이 아꼈다. 그는 매번 경서를 강의할 때면 그 닭을 학생들 사이에 두었는데, 그러면 닭이 학생들의 책을 할퀴어서 찢곤 했다. 닭을 쫓아내는 학생은 반드시 그에게 야단을 맞았다.
“이 닭은 오덕(五德)을 겸비하고 있는데 너는 어찌하여 그를 업신여기느냐?”
장창종도 일찍이 이 닭 때문에 매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왕본립과 한완은 이 일에 자못 불평하면서 말했다.
“저 고루한 유생은 세상일을 알지 못하니 우리가 공(公 : 장창종)을 위해 저놈의 닭을 죽이겠소.”
장 박사는 평소에 학생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가져다가 닭의 모이로 주었는데, 왕본립이 일 처리를 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한지 여부를 물어보았더니 왕본립이 말했다.
“문서에 기록해 놓으면 됩니다.”
장 박사는 기뻐하며 매일 학생들이 남긴 음식을 받아 가서 모두 문서에 기록해 두었다. 다른 날 장 박사가 휴가를 내자 왕본립은 고소장을 써서 그 닭의 죄행을 하나하나 열거한 후 잡아서 먹어 치웠다. 장 박사는 태학으로 돌아온 후 닭이 보이지 않자 놀라며 말했다.
“내 발 공자는 어디에 있느냐?”
좌우에서 왕본립이 죽였다고 알려 주자 장 박사가 대노하며 말했다.
“고소장을 가져와라, 고소장을 가져와!”
그는 열거한 닭의 죄행을 보고 말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죽여서는 안 되지.”
왕본립이 말했다.
“닭은 사람과 달라 곤장을 칠 수도 없으니 죽이는 게 마땅합니다.” 협 : 말을 잘했다.
장 박사는 손으로 책상을 재삼 치며 말했다.
“발 공자는 고소장이 제출되었을 때 또한 무엇을 알았겠는가?” 협 : 고루함이 심하도다!
당시 장안(長安)에서는 고소장이 제출되면 그 사안을 사실이라고 여겼다.
38-1(1055) 안영(晏嬰)
제(齊)나라의 안영은 키가 작고 왜소했는데, 그가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초나라에서는 큰 문 옆에 작은 문을 만들어 놓고 안자(晏子 : 안영)를 맞이했다. 그러자 안영이 들어가지 않으면서 말했다.
“개 나라에 사신으로 왔으면 개구멍으로 들어가겠지만, 지금 신은 초나라에 사신으로 왔으니 개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초나라 왕이 말했다.
“제나라엔 인재가 없나 보오?”
안영이 대답했다.
“제나라에서는 현명한 자를 현명한 왕에게 사신으로 보내고, 못난 자를 못난 왕에게 사신으로 보냅니다. 저는 못난 사람이므로 왕께 사신으로 온 것입니다.”
초나라 왕이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
“안영은 말주변이 뛰어난데, 내가 그를 곯려 주고 싶다.”
사람들이 좌정하자 한 사람을 포박해서 끌고 왔다. 초나라 왕이 물었다.
“뭐 하는 사람이냐?”
좌우 신하들이 대답했다.
“제나라 사람인데 도둑질을 했습니다.”
초나라 왕이 안영을 보며 말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도둑질을 잘하는가 보오?”
안영이 대답했다.
“제가 듣기에 귤나무는 강남에서 자라는데 그것이 강북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가지와 잎은 서로 비슷하지만 열매와 맛이 다른 것은 수질과 토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제나라에서 자랄 때는 도둑질을 할 줄 몰랐는데 초나라에 들어와서는 도둑질을 했으니, 아마도 초나라의 수질과 토양이 그를 도둑질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초나라 왕이 웃으며 말했다.
“과인이 도리어 사서 욕을 먹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