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의 특별한 학습자들
북레터 [주간 인텔리겐치아]입니다.
안녕하세요. 북레터 인텔리겐치아입니다.
사람에 따라 배우는 이유, 배우는 방법은 모두 다릅니다. 이런 차이는 가르치는 이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의 욕구를 지닌 다양한 학습자들은 서로의 배움을 풍성하게 하게 때문이지요. 당신 곁의 다양한, 그리고 특별한 학습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낯선 장소에서 낯선 언어로 학습하는 이들 ≪중도입국청소년의 학교생활≫ 나고 자란 곳을 갑자기 떠나야만 한다면? 하루아침에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면? 중도입국청소년, 즉 재혼가정 및 국제결혼가정의 자녀 중 타국에서 성장하다 청소년기에 한국으로 오게 된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언어와 문화 차이, 낯설고도 친숙한 가족들과의 관계, 국적과 비자 문제 등을 동시에 다뤄야 하는 이들은 자기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 하는 ‘청소년’이자 학교 안팎을 오가는 ‘학습자’입니다. 그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지만, 중도입국청소년이 공교육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고 학교에서는 이들에게 어떤 교육활동을 지원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된 적은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중도입국청소년들의 교육적 필요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삶과 이야기에 주목했습니다. 오랜 시간 중도입국청소년과 함께한 교육 전문가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였고요. 중도입국청소년이 어떤 필요와 가능성을 가지고 우리 교육 현장으로 들어오는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이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학교와 제도의 벽을 넘어, 계속해서 일상에서 배우는 이들 ≪성인교육의 의미≫ 평생학습, 평생교육의 시대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학교를 떠나서도,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벗어나서도 배움은 계속됩니다. 이 책은 성인의 배움을 광대하게 사유한 최초의 학자인 에두아르드 C. 린드만이 1926년에 쓴 것으로, 그간 실천으로만 존재하던 성인교육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최초의 책입니다. 린드만이 말하는 성인교육은 삶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학교’와 ‘제도’라는 벽을 넘어 일상의 경험이 가장 큰 가치를 지닙니다. 린드만은 성인교육이 성인이라는 대상에 국한된 교육이 아니라 성인의 원숙함에 도달하기 위한 교육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지성·힘과 권력·자기표현·자유·창조·예술 감상 등 인간이 지향하는 여러 목표와 성인교육의 관계를 밝히고, 그 속에 담긴 성인교육의 의미를 명확하게 제시하지요. 성인교육은 우리의 힘을 확장하고, 완전한 자기표현과 창조를 이끌며, 자유를 지향하게 합니다. 또한 즐거움을 조명하고, 인격을 통합하며, 역동적인 유대감으로 이끌어 내는 기제이자 희망입니다. 린드만은 경험의 의미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 그리고 품성의 성장이 성인교육의 목표이자 가치라고 말했습니다.
배움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회적 관계 체계인 젠더는 지식과 학습과 배움에 영향을 미치죠. 젠더화된 문화는 여성과 남성에게 서로 다른 유형의 지식과 능력을 습득할 기회를 제공하고, 각각의 경험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형성합니다.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조차 서로 다른 흥미와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기존의 학습 이론, 학습 장면, 학습 참여자 개념이 전제하는 보편성에 반기를 들고 그로 인해 간과되었던 여성의 학습을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가정을 바탕으로 삼아 여성의 학습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첫째, 여성의 학습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둘째, 여성의 학습을 폭넓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은 젠더 역할과 규범의 사회적 결정 요인을 포괄해야 한다. 셋째, 여성의 삶과 학습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만큼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넷째, 여성의 학습 기회와 결과에 계속 존재했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던 여성의 학습에 대한 정보를 한데 모았습니다.
능력주의 체제에서 성공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 이들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도 무언가를 배우고 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거대한 능력주의의 체제 안에서 자신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무기력을 배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은 두 가지 중요한 논의 과제를 던져 줍니다. 첫째, 학생들을 소외와 참여 기피에서 벗어나 수업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수업 문화 또는 교실 질서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까요? 둘째, 수업의 교육적 의미가 교사와 학생들에게 깊이 공유되지 못하고, 오직 도구주의적 가치에 지배당하고 있는 교실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요? 자는 아이들을 환대하며, 이들의 박탈된 학습권을 회복하고, 이 아이들의 주체적 힘을 길러 줄 수 있는 교실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학습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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