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용 / 과거의 여인
독일 희곡 신간 ≪황금용/과거의 여인≫
이빨은 말이 없다
저명한 치과 의사의 말에 따르면 썩은 어금니 하나를 뽑는 일은 맹장 수술만큼 위험하다. 그곳에는 혈관과 신경이 지나가고 무엇보다 뇌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의사를 만날 수 없는 불법 이주자에게 충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한 남자가 과다 출혈로 죽은 뒤 뽑힌 이는 강물에 던져진다. 황금 용이 날기 시작한다. 검은 그림자가 라인 강을 헤엄친다.
토론토 타라곤 테아트르(Tarragon Theatre)에서 2012년 상연된 <황금 용> 한 장면. 로스 맨슨(Ross Manson)이 연출했다.
나는 다리에서 물속으로 떨어집니다.
내 육신은 차가운 강물에 빠집니다.
이가 빠진 틈으로 물이 내 몸속에 흘러들어 오고,
나는 헤엄쳐서 집으로 갑니다.
강물이 나를 포용합니다.
나를 싣고 흘러갑니다.
1킬로미터 지나 또 1킬로미터를.
나는 북해로 쓸려 갑니다.
해류가 나를 북쪽으로 몰고 갑니다.
노르웨이 다음엔 핀란드와 러시아를 거쳐서,
얼어붙은 북극해로,
바다가 얼었으면 얼음 밑으로 흘러가지요.
혹시 물고기나 고래가 나를 끌고 갈지도 모르죠.
북극해를 통해서 러시아와 시베리아 전체를 흘러 지나갑니다.
멀고 먼 여행이지요.
베링해협과 베링 해를 횡단하면
그다음엔 캄차카반도가 나오지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곧 집에 도착합니다.
새벽녘에 멀리 보이는 일본을 지나서 같은 날 저녁 무렵,
드디어 중국입니다.
도착했어요.
집에 거의 다 왔습니다.
이제 황하를 3천 킬로미터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황하를 따라서 상류로,
황하를 따라서 상류로,
세 개의 성(省)을 통과하고,
처음엔 서쪽으로 그다음엔 북쪽으로,
그러면 집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대체 얼마나 오래 여행했나요?
수주일? 수개월? 또는 수년?
먼 여행이었습니다.
아주 멀고 먼 여행이었지요.
길 떠난 지 여러 해가 됐을 수도 있겠지요.
내 꼴은 어떤가요?
바닷물과 강물에 씻겨 버린 뼈에는 살점이 붙어 있지 않겠지요.
해초만 몇 잎 붙어 있겠죠.
아마도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 겁니다.
다시 집에 돌아와서 기뻐요.
<황금 용> 46장, 롤란트 시멜페니히 지음, 이원양 옮김, ≪황금 용/과거의 여인≫ 106∼108쪽
어떤 장면인가?
돈을 벌기 위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찾은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앓게 되는 청년의 치통은 죽음에 이르는 향수병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런 운명이 그만의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황금 용>은 어떤 작품인가?
2009년 초연되어 같은 해에 뮐하임 연극제 일등상을 받았다. 월간 연극 잡지 ≪테아터 호이테≫에서 ‘2010년의 극작품’으로 선정되었다.
뭘하임 연극제는?
신작 희곡의 최고 경연장으로 정평이 난 연극제다. 초청받은 작품은 그 자체로 중요한 평가를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 내용은?
독일 대도시에 있는 타이-차이나-베트남 간이식당 ‘황금 용’이 배경이다. 여기서 일하는 불법 이주자 중국인 청년은 이가 아파도 치과에 갈 수 없다. 신분증이 없기 때문이다. 식당 부엌에서 옛날 방식대로 이를 뽑다가 과다 출혈로 사망하고 시신은 동료가 강물에 버린다. 뽑힌 충치는 공중을 날다 손님인 스튜어디스의 수프에 떨어진다. 그녀도 이빨을 강물에 던진다. 황금 용 식당 건물 위층이나 이웃에 사는 독일인들도 개인적으로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비좁은 황금 용 식당 부엌에서 일하는 외국인 종업원들과 독일인들의 불행한 삶이 동시에 조명된다.
뭘 말하나?
구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된 후 지구화 또는 세계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유럽에는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인구가 유입되면서 불법 이민자 문제가 야기되었다.
주제는?
세계화의 비참한 현실이다.
세계화는 무엇이 비참한가?
자본가는 국경 없는 세계를 자유로 넘나들며 부를 증식할 수 있다. 소시민은 여전히 가난하고 비참하게 산다. 부유한 나라 독일에서 불법 이주민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법과 제도의 제약, 사회적 차별, 심지어는 죽음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독일인들은 행복한가?
한국에도 장기 체류 이주민이 100만 명이다.
한국에서는 이제 막 시작된 문제다.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이 시작된 1960년대 무렵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다양한 문제가 논의되어 왔다. 독일 경험에서 배울 바가 많다.
관객이나 독자의 동정심을 기대하는가?
그럴 수 있겠지만 작가는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해 극적 효과나 값싼 동정심을 배제했다.
어떤 기법이 동원되나?
‘젊은 남자’, ‘60세가 넘은 여자’ 등 모두 5명이 등장해 17개 역할을 소화한다. 남자가 여자 를, 여자가 남자를 연기하기도 한다. 등장인물은 해설도 하고 대사도 하면서 동시에 지문도 말한다. 따라서 배우가 등장인물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관객도 배우의 연기에 빠져들 수 없다. 브레히트의 생소화 효과를 더욱 정교한 형태로 발전시켰다.
현지 공연과 반응은?
2009년 초연되었다. 2010년 뮐하임 연극제에서 일등상을 수상한 이후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있으며 호평 받고 있다.
국내 공연 계획은?
2013년 4월에 용인대 윤광진 교수 연출로 서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작품 평가는?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희곡 기법에서도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평가된다.
롤란트 시멜페니히는 누구인가?
현재 독일을 대표하는 극작가다. 1967년 출생했다. 1996년 <영원한 마리아>가 오버하우젠에서 공연된 이후로 30여 편 이상 극작품을 발표했으며 연출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40여 개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공연된다.
독일 내 위상은?
2000년부터 2009년까지 모두 여섯 차례 뮐하임 연극제에 초청받았다. 엘제-라스커-쉴러 상, 실러 기념상, 네스트로이 연극상, 뮐하임 연극작가상을 수상했다. 독일 괴테 인스티투트 홈페이지에는 ‘새로운 독일어권 희곡 문학’에 엄선된 희곡 작가 55명이 소개되어 있는데 시멜페니히도 그중 한 사람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원양이다. 한양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고 한국브레히트연극연구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