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사문수간(師門手簡)≫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의 나이 27세인 1550년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570년까지 이황이 조목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으로, 월천의 나이 65세에 직접 8책으로 첩을 만들어 이황의 후손에게 전해 도산 서원 광명실(光明室)에 보관했다. 이후 정조 16년(1792) 도산과(陶山科)를 보일 때 이만수(李晩秀, 1752∼1820)가 ≪사문수간≫을 가지고 상경해 정조에게 올렸다. 이 서첩을 본 정조는 2년 뒤인 1794년 직접 발문(跋文)을 지어 승지 이익운(李益運, 1748∼1817)을 통해 도산 서원으로 보내 지금까지 전해져 오다가 지금은 옥진각(玉振閣)의 전시용 2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한국국학진흥원 고문서자료실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
조목은 15세(1538) 겨울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이황은 38세로, 조목과는 23세 차이가 난다. 당시 이황은 정6품 좌랑의 관직으로 서울에 있다가 한 해 전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와 있었다. 이후 조목은 18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 잠깐 성균관에서 지낸 때를 제외하고는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공부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제자에게 이황은 수시로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펴거나 학문적 토론을 이끌기도 한다.
200자평
퇴계 이황이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를 모았다. 편지 사이에 드러나는 가족과 제자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멀게만 느껴졌던 대학자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 준다. 제자와 성리학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그 이론이 타당하면 제자의 지적도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학문에 대한 그의 자세를 살필 수 있다. 성리학에 대해 설명하는 별지의 글에서는 이기이원론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지은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1501년 11월 25일 안동 예안현 온계리에서 진사 이식(李埴)과 박씨 부인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세에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등을 배웠고 12세에는 숙부 송재공(松齋公) 이우(李堣)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 15세에 게[蟹]를 보고 <부석천사자유가(負石穿沙自由家)> 등의 시를 지었고 20세에는 ≪주역(周易)≫을 탐독했다.
21세에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에 유학한다. 27세에 경상도 향시에 2위로 합격하고 28세에 진사회시에 2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옮긴이
박상수(朴相水)는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사편찬위원회, 온지서당 등에서 한문과 고문서, 초서를 공부했고, 단국대학교에서 한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단국대학교 강사, 한국한문학회 출판 이사, 고전문화연구회 상임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뿌리정보미디어 한문 번역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문 번역과 탈초, 강의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와 논문으로는 ≪고시문집(古詩文集)≫, ≪붓 끝에 담긴 향기(香氣)≫, ≪동작금석문집(銅雀金石文集)≫, ≪사상세고(沙上世稿)≫, ≪미국 와이즈만 미술관 소장 한국 문화재 도록≫, ≪다천유고(茶泉遺稿)≫, ≪탈초·국역(脫草·國譯) 초간독(草簡牘)≫, ≪간찰, 선비의 일상≫, <초간독 연구>, <간찰소고>, <설문해자와 육서심원의 부수 비교 연구> 등이 있다.
차례
제1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말함
사경·문원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보냄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 보게
제2
사경(士敬)에게 답함
사경에게 보냄
사경에게 답함
사경·협지에게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여러분께 안부함
사경 보게
사경·협지·돈서(惇敍) 등에게 답함
월천 조 상사에게 부침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조사경의 유거(幽居)에
사경의 방문에 감사한 시에 차운함. 절구 두 편
부용동의 여러 시에 차운함
사경에게 알림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제3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안부함
조사경에게 부침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부용주인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제4
사경을 위로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말함
사경·문원에게 말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을 초대함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 보게
제5
사경과 문원에게 말함
사경에게 답함
별지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별지
사경에게 안부함
별지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께 답함
사경과 문원에게 말함
대성·간지·사경·문원에게는 전어 각 다섯 마리
사경에게 안부함
제6
사경에게 답함
사경 보게
별지
산에 살면서 우연히 병중의 심정을 써서 사경과 문원에게 부침
사경에게
조사경이 질문한 ≪심경(心經)≫에 답함
별지
사경이 술을 가지고 방문함
사경에게 말함
사경에게 말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별지
사경에게 답함
제7
사경께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 보게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께 답함. 다래 조 생원 댁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께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말함
사경에게 다시 말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문원 제군에게 말함
제8 별록(別錄)
사경에게 답함
조·이·권·박 여러 상사에게 안부함
제군들에게 말함
별지
광영당에 가랑비 내린 뒤 지음
조사경의 ‘명(明)’ 자 운에 화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부용산인에게
제군들이 점필재(佔畢齋)에 대해 지은 시에 차운했던 한 수의 시를 지금 다시 고침
신숙계(申啓叔)에게 보낸 답장을 지금 보충함
문원 보게
정조 대왕 어제 발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요사이 책을 읽고 이치를 완미하는 재미가 더할 것이라 생각되네. 영양(永陽)으로 가는 길은 그만두었다고 들은 듯한데 정말인지 모르겠네. ≪이학록(理學錄)≫ 초고본 한 책과 함께 공책, 필묵을 보내니 번거롭지만 일을 시작해 주기 바라네. 그렇지만 마음 편하게 일하고 모쪼록 일정에 쫓기지는 말게. 전번에 수정한 것은 너무 소략한 듯해 요사이 다시 수정을 거쳤지만 반드시 다 적절하지는 않을 걸세. 온당하지 않은 곳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다시 손질하는 것이 어떻겠나? 그리고 수록된 사람마다 <전(傳)>의 머리에 마땅히 ‘사전략(史傳略)’이라는 세 글자를 써 두어야 하네. 원(元)나라 이후 사람은 아직 다 쓰지 못했으니 반드시 하나의 양식에 따라서 하나의 예로 써야 하네. <전(傳)>을 완전하게 쓴 것은 ‘약(略)’ 자를 없애는 것이 좋겠네.
차가운 서재라 벼룻물이 얼 텐데, 숯 한 섬으로 그런대로 질화로의 훈기를 갖추고, 백지 한 묶음은 혹시라도 책을 베끼는 데 쓰기 바라네. 붓이 얼어 급히 쓰네. 9일, 계로(溪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