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담헌 홍대용은 35세(1765) 때 동지사 서장관의 신분으로 사신 가는 숙부 홍억(洪檍)을 수행해 떠난 60일의 연경 생활에서 평생을 그리워하며 존경했던 중국 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는 우연한 조우가 아닌 길을 나서기 전부터 품고 있던 바람의 결과였던 것이다.
1766년 1월 26일,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연경의 유리창 거리에 안경을 구입하러 갔다가 우연히 엄성과 반정균을 만난다. 며칠 뒤 2월 1일 아침, 이기성이 엄성의 숙소로 사람을 보내 말을 전했고, 이 소식을 들은 담헌이 이틀 후 2월 3일, 김재행(金在行)과 함께 이기성을 앞세워 건정동으로 두 사람을 찾아갔다. 당시 엄성은 35세, 반정균은 25세, 담헌은 36세, 김재행은 49세였다.
2월 17일, 담헌은 중국의 과거 제도에 관해 대화를 주고받고, 그들의 주선으로 2월 23일, 그 전날 연경으로 올라 온 48세의 육비와 만났다. 1766년 2월 한 달 동안 나이도 엇비슷한 담헌과 엄성은 연경에서 일곱 차례를 만나며 교분을 나눈다.
또한 김재행, 엄성, 육비, 반정균은 서로 의형제를 맺고, 3월에 헤어지면서 담헌은 “한번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죽어 지하에서 만나더라도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자!”고 했고, 엄성은 “바다가 마르고 바위가 다 닳아도 오늘을 잊지 말자!”고 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던 간절함은 모두 <항전척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누구나 예상하듯이 이역만리 떨어진 외국의 벗과 사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한 나라 안에서도 편지가 중간에서 누락되어 전해지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전팽(專伻), 위팽(委伻)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즉시 전달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헌은 중국의 벗에게 다양한 주제로 갖가지 크고 작은 궁금증을 허심탄회하게 묻고 또 물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은 오늘날의 편지 전달과는 달리, 상상하기조차 힘든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국경을 뛰어넘는 학문에 대한 깊이와 간절한 우정은 오늘날의 어떤 편지와도 비교하기 어렵다.
2016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에서 담헌이 받은 중국 선비들의 편지 모음집인 ≪중사기홍대용수찰첩(中士寄洪大容手札帖)≫이 간행되었다. <항전척독>은 담헌이 중국의 벗들에게 보낸 편지만 실려 있어 앞서의 수찰첩과 함께 안팎으로 짝을 이루어 일람한다면, 18세기 조선 지식인과 중국 지식인의 교유를 짜임새 있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200자평
옛 선비들의 교제는 어떠했을까? 담헌 홍대용이 사신단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사귄 중국 학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었다. 당시 학자들의 관심사, 학문에 대한 자세는 물론, 선비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벗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살필 수 있다.
지은이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1731년에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 마을에서 홍력(洪櫟)과 청풍 김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1742)에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나아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수학했다. 16세(1746)에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훗날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거문고의 명수’라고 칭찬했다.
21세(1751) 여름에, 윤증(尹拯)의 글을 읽고 회니시비(懷尼是非)와 관련해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고 윤증의 주장에 동조했다.
24세(1754) 봄에, 김원행 문하생인 주도이(周道以)의 초상에 조문했으며 5월에 석실서원에서 김원행에게 ≪소학≫을 배웠다.
25세(1755)에 스승 김원행을 찾아온 박지원을 만났다. 훗날 홍대용이 중국을 다녀온 뒤 둘은 더욱 가깝게 교유했다.
26세(1756) 9월에 <봉래금사적(蓬萊禁事蹟)>을 지었다. 석실서원에서 황윤석(黃胤錫)을 만났다.
28세(1758)에 부친이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는 데 따라가 나주 향약과 <권무사목(勸武事目)>에 대한 서문을 지었다.
29세(1759)에 전남 화순군 이서면의 물염정(勿染亭)에 은거한 과학자 나경적(羅景績)을 찾아가 교유하며 혼천의와 자명종 등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3년 후, 혼천의와 자명종을 완성하고 고향 집에 농수각(籠水閣)을 짓고 혼천의와 자명종을 보관했다.
32세(1762)에 부친이 환곡에 관한 일로 예천(醴泉)에 5년간 금고형에 처해졌다.
35세(1765) 11월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인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을 수행해 연경에 갔다.
36세(1766)에 연경에서 항주에서 온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 등을 만나 형제의 의리를 맺었다. 6월, 돌아와 그간의 필담과 주고받은 서찰을 엮은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과 <항전척독(杭傳尺牘)>을 완성했다.
37세(1767)에 ≪해동시선(海東詩選)≫을 완성해 항주의 반정균에게 보냈다. 11월, 부친상을 당한 후 과거를 단념했다.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교유했다.
38세(1768)에 엄성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문을 지어 보냈다.
42세(1772) 7월에 스승 김원행이 사망했다.
43세(1773)에 ≪의산문답(醫山問答)≫과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했다.
44세(1774) 봄에, 이송(李淞)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다.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繕工鑑監役), 돈령부 참봉(敦寧府參奉)에, 12월, 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 侍直)에 임명되었다.
46세(1776) 3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임명되었다.
47세(1777) 7월에 태인현감(泰仁縣監)에 임명되었다.
49세(1779) 12월에 영천군수(榮川郡守)에 임명되었다.
53세(1783) 5월에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 상소를 올렸다. 10월 23일에 중풍으로 사망했다. 12월, 청주 구미평(龜尾坪)에 장사 지냈고 박지원이 묘지명을 지었다.
옮긴이
박상수(朴相水)는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사편찬위원회, 온지서당 등에서 한문과 고문서, 초서를 공부했고, 단국대학교에서 한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단국대학교 강사, 한국한문학회 출판 이사, 고전문화연구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고전문화연구회와 대동한문고전번역원 한문번역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문 번역과 탈초,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번역서와 탈초 자료, 논문으로는 ≪고시문집(古詩文集)≫, ≪붓 끝에 담긴 향기(香氣)≫, ≪동작금석문집(銅雀金石文集)≫, ≪사상세고(沙上世稿)≫, ≪미국 와이즈만 미술관 소장 한국 문화재 도록≫, ≪다천유고(茶泉遺稿)≫, ≪탈초 국역 초간독(草簡牘)≫, ≪간찰, 선비의 일상≫, ≪사문수간(師門手簡)≫, ≪습재집(習齋集)≫, <초간독 연구>, <간찰소고>, <설문해자와 육서심원의 부수 비교 연구> 등이 있다.
차례
1. 소음 육비에게 보내는 편지(與陸篠飮飛書)
2. 철교 엄성에게 보내는 편지(與嚴鐵橋誠書)
3. 추루 반정균에게 보내는 편지(與潘秋𢈢庭筠書)
4. 낭정 서광정에게 보내는 편지(與徐朗亭光庭書)
5. 소음에게 보내는 편지(與篠飮書)
6. 철교에게 보내는 편지(與鐵橋書)
7. 구봉 엄과[성(誠)의 형(兄)]에게 보내는 편지[與嚴九峰果(誠兄)書]
8. 추루에게 보내는 편지(與秋𢈢書)
9. 소음에게 보내는 편지(與篠飮書)
10. 철교에게 보내는 편지(與鐵橋書)
11. 추루에게 보내는 편지(與秋𢈢書)
12. 명기집략변설(明記輯略辨說)
13. 홍화포의 주청일록약(洪花浦奏請日錄略)
14. 소음에게 보내는 편지(與篠飮書)
15. 추루에게 보내는 편지(與秋𢈢書)
16. 구봉에게 보내는 편지(與九峯書)
17. 엄철교 제문(祭嚴鐵橋)
18. 엄노백에게 보내는 편지(與嚴老伯書)
19. 엄앙에게 보내는 편지(與嚴昻書)
20. 추루에게 보내는 편지(與秋𢈢書)
21. 문헌 등사민에게 보내는 편지(與鄧汶軒師閔書)
22. 용주 손유의에게 보내는 편지(與孫蓉洲有義書)
23. 매헌 조욱종에게 답하는 편지(答趙梅軒煜宗書)
24. 매헌에게 보내는 편지(與梅軒書)
25. 용주에게 보내는 편지(與蓉洲書)
26. 등문헌에게 답하는 편지(答鄧汶軒書)
27. 엄구봉에게 보내는 편지(與嚴九峰書)
28. 엄앙에게 보내는 편지(與嚴昻書)
29. 낭재 주문조에게 답하는 편지(答朱朗齋文藻書)
30. 손용주에게 답하는 편지(答孫蓉洲書)
31. 손용주에게 보내는 편지(與孫蓉洲書)
32. 손용주에게 보내는 편지(與孫蓉洲書)
33. 문헌에게 보내는 편지(與汶軒書)
34. 손용주에게 보내는 편지(與孫蓉洲書)
35. 등문헌에게 보내는 편지(與鄧汶軒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저는 벗이란, 서로 선(善)을 권하고 인(仁)을 돕는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선과 인은 사람이 사람인 이유이니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선과 인을 닦으려는 사람도 선을 권하는 사람이 없으면 학문에 힘쓸 수 없고, 인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덕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벗의 소중함이니 군신과 부자와 함께 오륜에 드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말하는 벗이란, 어깨를 치고 소매를 붙잡으며 서로 사귀면서도 겉과 속을 달리하며 예를 찾으면 소원해지고 어려운 일을 맡기면 멀어지며 환심이나 사면서 서로를 병들게 하고 권세와 이익으로 서로 불러들여 결국에는 향원(鄕原)이 되어 가면서도 잘못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를 벗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군신과 부자의 오륜 속에 넣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한번 형을 만나고 나서 넓고 활달한 덕의 도량과 얽매이지 않는 시원스러운 기풍을 사모해 심취한 듯 온 마음을 다해 교분을 맺었으니 이는 선을 권하고 인을 도와주시기를 바라서입니다. 이미 명성과 위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또 환심을 살 처지도 아니니 그 뜻이 진실로 흔하고 천박한 습성에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산과 바다로 가로막혀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어 멀리서나마 그리워하고 서로 권면하기를 오직 편지에만 의지할 뿐입니다. 자질구레한 그리움은 말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오직 노형께서 저에게 선을 권하고 인을 도와주시어 따끔한 가르침을 주셔서 정신 차려 마음을 다잡고 반성해 소인이나 되지 않게 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