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매천야록≫이 작성되던 시기는 조선 사회의 전통과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던 격동기였다. 이 시기 조선은 안으로는 정치의 혼란을,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국권을 상실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황현은 이 책에서 혼란했던 그 시기의 정국과 사회상, 국제 관계 등을 중심으로 사회·민족·문화 등 각 부분의 모든 사실을 종횡으로 취급했다. 특히 무능했던 치자(治者)층의 부패상과 권력의 농단, 국가 정치 기강의 해이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상을 절절히 담아냈다. 또한 당시 지배층들에서부터 민초에 이르는 생활상, 서울의 도시적 변화, 개화의 미명 아래 유입되던 서양 문물과 그에 대한 민초들의 반응을 소상히 기록했다.
≪매천야록≫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오랜 시일을 기다려야 했다. 황현은 순절할 때 자손들에게 유훈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 책을 보이지 말 것을 당부했고, 후손들은 극비에 붙여 깊이 간직했다. 그 후 책의 일부를 중국에 망명 중이던 김택영에게 비밀리에 보내어 교정과 편찬을 청했는데, 김택영이 자신이 편저한 ≪한사계(韓史綮)≫를 엮을 때 ≪매천야록≫을 인용했음을 명시하면서, 이 책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원본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 공개되었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이 책을 등사했는데,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 등사본을 가지고 원본과 대조한 후 ≪한국사료총서≫ 1집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매천야록≫에서 구한말의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주로 골랐다. 특히 서구의 물결이 밀어닥치는 상황에서 당시 민초들의 삶과 풍속을 살필 수 있는 내용들을 선별했다.
200자평
고종이 즉위한 1863년 전후부터 1910년 한일 합방 조약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기까지 48년간의 정치·사회·민족·문화 등을 생생하게 담아 낸 필기류(筆記類)다. 이 책에서 독자는 다른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한말 개화와 보수, 침략과 저항의 소용돌이를 경험한 지식인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보게 될 것이다.
지은이
황현은 광양현 서석촌(현 전라남도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라 했다. 출신 가계를 보면 장수 황씨로 황희 정승의 후손이기는 하나, 중간에 가세가 영락해서 그의 조부에 이르러서는 상업으로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이렇게 축적한 재산을 기반으로 황현은 1천 권의 장서를 갖추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나, 관력은 불우하여 34세에야 겨우 성균관의 생원이 되는 데 그쳤다. 그는 생원이 된 후, 조선 안팎으로 혼란한 세상을 등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거실에 구안옥(苟安屋)이라 이름을 붙이고 독서와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서울에 있는 여러 친구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구국 운동에 참가하라”라고 권유했으나, 그때마다 “그대들은 어찌 나를 귀신 나라에서 날뛰는 미친 사람들 가운데로 끌어들여 같은 귀신, 미친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가” 하고 도리어 엄절히 책망했다.
혼란한 세상에서 그는 비록 은거했으나 망국상을 그대로 보고 있지는 못했다. 지기였던 김택영이 벼슬을 버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것처럼 자신도 망국인의 방도를 생각한 듯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일본은 소위 한일병합조약이라는 것을 발표해 나라와 민족의 멸망을 공식화했다. 이 소식을 듣고 애절한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했다.
옮긴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으며(2004∼2005), 현재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조선후기 수도방위체제≫(공저: 바다출판사, 2004)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조선 숙종∼영조대 근기지역 노론학맥 연구>(2003), <조선후기 석실서원의 위상과 학풍>(≪조선시대사학보≫11, 1999), <퇴계 이황의 서원 건립 활동과 서원론의 실현>(≪역사문화논총≫2, 2006), <조선 서원의 전개 과정에서 바라본 사림계의 서원관>(≪한중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2007) 등이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권1 상, 갑자년(1864)∼정해년(1887)
운현궁
장동 김씨
국혼
김흥근의 별장
세도
대원위 분부
태산을 평지로
원납전
만동묘
서원
당백전과 청전
천주교인 남종삼
도모지
해인사 경판각
운현의 청지기
운현의 사람 쓰기
종친과
포량미
북촌과 남촌
어재연의 순절
잠영록
산림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척양비
최익현의 상소
최익현의 생활
대원군의 10년 통치
십 년 세도
운현궁 쪽 사람
전주 아전
김상현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의 기억력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거벽·사수
조흘강과 매좌
과거시험장
지방에서 보이는 시험
과거 매매의 값
가수와 실재
낙폭전
석 돈 진사
궁중 연회
신분제도
무과제도
무관명가
신래
유가
대원군의 수완
나합
우두법의 시행
학질의 금계랍
석유
개항 이후의 수입품
영선사 김윤식
전환국
북관묘
화륜선 구입
임오군란
대원군의 재집정
문묘종사
복제 개혁
민영익의 저택
개항
과거 매매
토문강 국경선
육영공원
청붕과 허교
장탕반
서얼
전보국
송금
권1 하, 무자년(1888)∼계사년(1893)
세자의 소년 시절
노인 난리
최제우의 복주
권2, 갑오년(1894)∼무술년(1898)
갑오년(1894), 고종 31년
전봉준
아리랑 타령
옥당풍년
중궁의 총명
국한문 혼용
은전과 엽전
을미년(1895), 개국 504년
영은문·삼전도비의 훼철
십 년 사이의 세상 변화
전봉준 등 처형
형사법 개정
전주의 약령 설치
한성의 승금 해제
백관의 연봉 제정
관리의 연봉 제정
호열자의 유행
공문서를 국한문으로 하다
개국기원절
광견병
울릉도
인정종·파루종
단발령
병신년(1896), 개국 505년
단발령과 의병
비
지방 관원과 연봉
지방 관원의 임기 및 휴가
정유년(1897), 건양 2년
원구단
국기 제정
무술년(1898), 광무 2년
황성신문 창간
대원군 장례
철도사의 설치
독립협회
권3, 기해년(1899)∼계묘년(1903)
기해년(1899), 광무 3년
조경단 축조
의학교 설립
양교의 성행과 종현학당의 건립
전차
채회의 금지
명성후의 유혼
발명가
경자년(1900), 광무 4년
흑사병의 유행
일본의 흑사병원균 규명
영남 활빈당
신축년(1901), 광무 5년
희랍교 전도
안남미 수입
일본인의 식민 계획
계묘년(1903), 광무 7년
일본 상인들의 기념잔
양무호
경부선 철도 공사
권4, 갑진년(1904)∼을사년(1905)
갑진년(1904), 광무 8년
상화가와 매음가
무당 엄금
을사년(1905), 광무 9년
정토종
성적도 배포
일본인의 지금고 설치
권5, 병오년(1906), 광무 10년
독도
화투의 출현
권6, 정미년(1907)∼경술년(1910)
정미년(1907), 광무 11년
구미식 혼례
무신년(1908), 융희 2년
석전 금지
작잠법
기유년(1909), 융희 3년
단군교 창설
경술년(1910), 융희 4년
사색의 양반 조사
천조교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석유는 영·미 등 여러 나라에서 산출되는데 혹은 바닷속에서 나온다고도 하고, 혹은 석탄에 근원하는 것이라고도 하며, 또 돌을 가열하여 짜낸다고도 하는 등 그 설이 하나가 아니나 천연의 산물임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경진년(1880) 이후 처음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색이 붉고 냄새가 무척 지독했으며 한 홉이면 열흘 밤을 켤 수 있었다. 몇 년이 되지 않아 색이 점차 맑아지고 냄새가 점점 옅어졌으며 화력도 약해지더니 한 홉에 겨우 사나흘 밤밖에 켜지 못했다. 석유가 들어온 이래로 산과 들에 기름 짜는 열매들은 자라지 않게 되었다. 전국을 통틀어 위로부터 아래까지 사람들이 석유가 아니면 등불을 켤 수 없게 되었다. 무릇 물(物)은 양쪽이 다 커질 수는 없는 것이다. 양면(洋綿)이 들어온 뒤로 재래종의 면화 농사는 잘 되지 않았고 서양 철이 들어오자 철의 산출이 아주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일이 종종 있으니 또한 괴상한 일이다.
-69~70쪽
울릉도 바다 동쪽으로 백 리쯤 가서 하나의 섬이 있는데 ‘독도(獨島)’라고 한다. 예부터 이 섬은 울릉도에 속했는데 일본인들이 억지를 부려 그들의 영토라 주장하며 조사해 갔다.
-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