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김동명의 시 세계에는, 시적 대상과 시 정신으로 볼 때 서로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자연물과의 회감이 섬세하게 그려지는 순수 서정의 세계와 사회 현실에 대한 응시를 언어로 승화시킨 현실 지향적 시 세계가 그것이다. 순수 서정과 현실 지향의 두 세계는 김동명의 시에 공존하면서 서로 교차하기도 하며 한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문학을 향한 열정과 현실에 대한 참여 의지 사이의 길항과 조화를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순수 서정을 노래하는 시인의 내면에서 현실적 고뇌를 발견하게 되고, 현실 참여를 향한 의지에서 순수한 인간의 정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강경해지던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 김동명이 펼친 순수 서정의 시 세계는 시집 ≪파초≫와 ≪하늘≫의 시기에 확연히 나타난다. 자연 대상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노래하는 순수 서정이 농후한 이 시집들에서 그는 1920년대 시와는 다른 정제된 언어미를 보여 준다. 자연물에 대한 감흥을 성찰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그의 시는 감성적이면서도 이지적인 감각을 유지한다.
김동명의 시가 단순한 전원적 서정에 그치지 않는 근거로 주목할 점은 그 안에 담긴 현실 비애의 정취다. 대표작 <파초>를 통해서도 나타나듯이 그에게는 순수한 자연의 대상마저도 “조국”을 잃은 자신의 처지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감정의 대리물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외부적 상황은 그 자체로 현실 세계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하고, 젊은 시인의 울분의 목소리는 “불타는 향수”를 간직한 외로운 “넋”의 언어로 결정화된다. “불타는” 격정과 “수녀”에 비견한 외로움이 공존하는 시인의 내면 세계는 고요히 자연을 관조하는 자의 그것이 아니다. 격정과 고요를 동시에 지닌 그의 시에 나타난 외로움의 저변에는 아마도 현실을 향해 비상할 수 없는 식민지 청년의 상실감이 자리하리라 추측할 수 있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심경은 그의 절필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창씨개명을 거부한 그는 두 번째 시집 ≪하늘≫에 실린 <광인(狂人)>과 <술 노래>를 끝으로 해방되기까지 창작을 중단한다. “여보게, 나는 이제/ 이 琥珀빛 液體가 주는 魔術을 빌어/ 나의 새끼손톱으로/ 요놈의 地球떵이를 튀겨 버리려네”(<술 노래>)라는 그의 독백은 직접적인 현실 상황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절필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한 시인이 겪은 참담한 심정을 우회적으로 담고 있다.
김동명의 시에서 현실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해방 후부터다. ≪삼팔선(三八線)≫, ≪진주만(眞珠灣)≫과 마지막 시집 ≪목격자(目擊者)≫에 이르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삼팔선≫과 ≪진주만≫에는 같은 작품들도 다수 들어 있는데, 이것은 그가 월남하면서 ≪진주만≫의 원고들을 잃어버렸다가 아내의 도움으로 다시 찾아 펴내게 된 까닭인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의 시는 서정성보다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감각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파초≫, ≪하늘≫이 비교적 자연물을 대상으로 한 순수 서정을, ≪삼팔선≫, ≪진주만≫이 사회 현실에 대한 응시와 성찰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었다면 월남 후의 작품들인 ≪목격자≫는 정제된 시어로 현실을 묘파한 작품을 선보여 그의 시 세계의 두 특징을 적절히 조화시키고 있다.
200자평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라는 유명한 은유로 널리 회자되고 있는 시인 김동명. 그러나 그를 서정시인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서정시에 몰입하기보다는 도리어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의 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의 참 모습이 잘 드러나는 시편들을 가려 실었다.
지은이
김동명(金東鳴, 1900~1968)은 1900년에 강원도 명주(溟州)에서 태어났다. 1909년 원산소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함흥에서 영생중학을 다녔다. 1920년대 초반에 평남에서 교원 생활을 하다가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해방 후 원산에서 교원 생활을 하면서 정치에도 관심을 둔 그는 흥남시 자치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당 함남도당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식민 지배에 대한 치욕과 분노로 붓을 꺾은 바도 있다고 전해진다. 1947년에 월남해 ≪동아일보≫에 자유당의 부패상을 비판하는 정치 평론을 연재했고, 이것이 정계 진출의 계기로 작용해 민주당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했고, 1948년부터 1960년까지는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했다. 문인으로서, 교육자로서 활동하다가 1960년 이후에는 교육계를 떠나 정치에 주력했다. 문인으로뿐만 아니라 교육자, 정치가로 활동하며 현실과 응전하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는 1968년에 생을 마감했다.
엮은이
장은영(張恩暎)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현대시를 전공으로 문학 석사 및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차례
≪芭蕉≫
芭蕉
水仙花
黃昏
생각
내 마음은
손님
憂鬱
微笑
나의 뜰
現實
딸련이 운다
微風
그 얼골의 印象
사랑
≪하늘≫
바다
가을
芭蕉 호수
하늘 1
우리말
우리글
狂人
술 노래
그대의 머리털은
娼女像
歸路
≪三八線≫
避難民 2
설날
異邦
民主主義
自由
汽車
獄中記 1
獄中記 2
一九四六年을 보내는 노래
三八線
≪眞珠灣≫
雪中花頌
돌
江물이 흘러간다
가을
아가의 꿈
白雪賦
眞珠灣
사이판
東京
새 나라의 幻像
오랑캐꽃
白合花
접중花
다래 넝쿨
庭園行
後記
≪目擊者≫
世宗路
鐘路
明洞
新村洞
빠−江南
서울 素描
古宮 揷話
梨花女中 校門에 붙이는 노래
서울驛
양갈보
C女士와 빈대떡
그 이튼날
출발
目擊者
草梁驛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
우럴어 한瞬間에
千年을 살은 듯.
난 어지러워
깊은 물ㅅ가에 선 듯.
그러나 나는 海女같이
빛나는 눈瞳子로 네 품을 더듭노니,
瞬間과 永遠은
한 모습.
삶과 죽음은
풀 길 없는 수수꺼끼.
헤아릴 수 없는 깊음 속에
나의 悲憤을 잠그다.
재일 수 없는 넓음 속에
나의 웃음을 장사하다.
-<하늘 1> 시 전문.
●
눈물을 牛乳보다 더 좋아하는,
怪物.
저 똥똥한 뱃속에는
무엇이 드렀을고.
두 발을 처들고 내 앞에 다가선
이 고약한 즘생을
나는 발길로 탁 차 버리고
훌쩍 뛰여넘어 불까.
그렇지 않으면 강아지같이 졸졸 따르는
이 야릇한 즘생을
두 팔로 덤썩 안어
옆구리에 끼고 걸어 볼까.
정영코 그 굽은 발톱으 말을 일키면
동댕이를 처 버릴 섬 잡고…
허나 아모래도 그 붉은 혀와 힌 이빨이
마음에 싸지 않은걸.
-<現實> 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