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김광섭의 시는 부정한 사회에 대한 비판과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정신을 근간으로 삼는다. 전자가 주로 일제 치하와 광복의 혼란기, 그리고 급속한 도시화에 대한 시적 응전의 결과라면, 후자는 한 지식인으로 살아가면서 겪은 인생에 대한 성찰적 인식과 관계가 깊다. 그의 시는 편의상 세 시기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는 시집 ≪동경≫(1938)의 시기로서 일제 강점기의 절망감과 그것을 인고하려는 의지를 노래했다. 제2기는 시집 ≪마음≫(1949)과 ≪해바라기≫(1957)의 시기로서 지적 관조, 옥중 체험, 조국 해방, 전쟁의 상흔 등이 주조를 이룬다. 제3기는 시집 ≪성북동 비둘기≫(1969)와 ≪반응≫(1971)의 시기로서 민족 공동체 의식, 사회 비판, 생의 달관, 평화의 정신 등의 주제가 도드라진다.
요컨대 김광섭의 시는 전반적으로 저항과 성찰의 정신을 기반으로 삼는다. 저항의 대상은 일본 제국주의와 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 그리고 현대문명의 비정이나 사회 현실의 부정과 관련되는 것이다. 성찰은 주로 인생의 본질에 대한 반성적 인식과 관련된다. 특히 투병 시기의 시에는 어떠한 고난이 다가와도 그것을 삶의 긍정적 에너지로 삼아야 한다는 역설적 인생관이 도드라진다. 이 성찰도 허무주의나 퇴폐주의에 응전하는 마음과 관계 깊다는 점에서 저항 정신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200자평
<성북동 비둘기>로 낯익은 시인 김광섭. 그는 일제에, 이데올로기에, 그리고 현대 문명과 사회 부정에 저항한다. 그러나 데카당스에 머물지 않는다. 찬란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고난을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긍정적 저항 시인, 바로 김광섭이다.
지은이
김광섭(金珖燮)은 1905년 9월 22일 함경북도 경성군 어대진 송신동 14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한약방을 경영하던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가문이 기울면서 온 가족이 함께 북간도로 이주했다. 1917년에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에는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6년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원 영문과에 입학해 당시 불문과 2학년생이던 이헌구(문학평론가)를 만나 함께 자취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7년에는 와세다대학교 조선인 동창회보인 ≪R≫지에 시 <모기장>을 발표해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9년에는 제1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1932년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부터 모교인 서울의 중동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부임해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이 시기에 ‘극예술연구회’에 가담해 활동하면서 서항석(徐恒錫), 함대훈(咸大勳), 모윤숙(毛允淑), 노천명(盧天命) 등의 문인들과 교유를 활발히 했다. 이때부터 각종 신문에 시와 평론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첫 시집인 ≪동경(憧憬)≫을 발간했다. 1941년에는 수업 시간에 창씨개명을 공공연히 반대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3년 8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민족진영 문인들과 ‘중앙문화협회’를 창립했으며, 1946년에는 ‘전조선문필가협회’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일보≫의 사회부장을 맡아 언론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출판부장과 ≪민중일보≫의 편집국장을 맡았으며, 일시적으로 미 군정청의 공보국장을 맡기도 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 비서관으로 취임했으며, 이듬해에 제2시집 ≪마음≫을 발간했다. 1950년에는 문예지에도 관심을 기울여 ≪문학≫ 창간호를 발간했으나 6·25동란으로 중단했다. 1951년 대통령 공보 비서관을 사임하고, 1952년에는 대전에서 발간되는 ≪대한신문≫의 사장에 취임했다. 1952년에는 경희대학교 교수로 부임했고, 다음 해에는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 중앙위원으로 취임했다. 1955년에는 ‘한국자유문학자협회’ 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56년에는 문예지 ≪자유문학≫을 창간해 문단의 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1957년에는 제3시집인 ≪해바라기≫를 발간했다. 1958년에는 ≪세계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며,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집 ≪서정시집≫을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1959년 전국 ‘문화단체총연합회’의 상임 최고 위원과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 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61년에는 ‘한국 문인협회’ 발기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이사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64년에는 많은 정성을 기울였던 ≪자유문학≫이 운영난으로 휴간되자 정신적 충격을 받고 고혈압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65년에는 뇌출혈로 입원해 치병을 하다가 이듬해에는 제4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발간했다. 이후 1971년에는 제5시집 ≪반응(反應)≫을 발간하고, 1974년에는 ≪김광섭 시 전집≫을 발간해 문학적 생애를 총 정리했다. 1976년에는 자전적인 문집 ≪나의 옥중기≫를 발간하고 그 이듬해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엮은이
이형권(李亨權)은 충남대학교에서 ≪임화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시의 이념과 서정≫, ≪현대시와 비평정신≫,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 ≪한국시의 현대성과 탈식민성≫, ≪발명되는 감각들≫, ≪좋은 논문 쓰기≫(공저) 등이 있다. 학술지 ≪어문연구≫, ≪한국시학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문예지 ≪시작≫, ≪애지≫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학의 시대적, 역사적 의미를 탐구해 비판 정신과 소통의 미학을 확산시켜 나가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10년 ‘편운문학상’ 비평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차례
≪동경≫
孤獨
獨白
憧憬
送別
幻像
西天月
空寞
비 개인 여름 아츰
傳說
珊瑚 캐러 가다
초가을
달밤
憂愁
自畵像 三七年
苦悶의 風土誌
谷
≪마음≫
鳳仙花
水泳
마음
귀뜨람이
아름다운 생각하나
秘密
離別의 노래
獄愁
가을
獄窓에 기대여
罰
나의 사랑하는 나라
말 이야기
獨立의 길
民族의 祭典
≪해바라기≫
구슬
꽃을 집어 달고
들국화
가을이 서럽지 않게
이 어두운 時間을
보이지 않는 별
해바라기
사랑
젊은 詩人의 주검
孤魂
가는 길
南江有恨
夕陽 鐘路
車를 타고
나를 찾아 아침이 왔다
≪성북동 비둘기≫
봄
꽃 斷想
生의 感覺
고향
심부름 가는
성북동 비둘기
가을
서울 크리스마스
겨울날
山
나의 肖像
行人
距離
死者로부터의 艶書
雲禍
病
詩人
저녁에
自由
≪反應≫
大서울
변두리
새벽
獻身
아기
사람
풀잎에 앉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悲哀의 言語를 쪼차내고
信念의 中世를 쪼차내고
時代의 苦悶을 쪼차낸 뒤
나의 體重이 輕氣球가 되야 난다.
나의 未來가 輕快하게 上昇한다.
그다음엔 冠毛갓치 나는 하늘 지경에 가서 운다.
●地上에 내가 사는 한 마을이 있으니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러라
世界에 無數한 나라가 큰 별처럼 빛날지라도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
半萬年의 歷史가 或은 바다가 되고 惑은 시내가 되야
모진 바위에 부다처 地下로 숨어들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脈이 되는 生命일지니
나는 어데로 가나 이 끈임없는 生命에서 榮光을 찾어
南北으로 兩斷되고 思想으로 分裂된 나라일망정
나는 종처럼 이 무거운 나라를 끌고 神聖한 곳으로 가리니
오래 닫처진 沈黙의 門이 열리는 날
苦憫을 象徵하는 한 떨기 꽃은 燦然히 피리라
이는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라 내가 사랑하는 나라의 꿈이어니
●서울 길
人波에 밀려
예수는 전신주 꼭대기에 섰고
성탄의 환락에 취한 무리들
붐비고 안고 돈다.
번화가의 전등은 장사치들의
속임과 탐욕이 내놓이지 않도록
경축의 광선을
조심스레 상품 거죽에 던진다.
모든 나무들은 벌거벗었는데
성탄수만은 솜으로
눈 오는 밤을 가장했다.
예수는 군중 속에서 발등을 밟히다 못해
그만 어둠을 남겨 두고
새벽 창조의 시간을 향해
서울을 떠났다.
가로수들만이 예수를 따라갔다.
●갑자기 가시니
사방이 어두워서
동서남북이 다 없어졌네
저 어진 산 나직한 봉우리를
어머님 계신 지붕으로 알고
먼 절을 하며 가다 보니
그 아닌 길을 혼자 가고 있었네
어머님 앞에 아물거리던
고향의 낡은 뒤안길
창구미 상송 흰 벌!
남북이 통하면 먼저
뫼시고 가오리 가오리 하던
그 길이 다시 열릴 때
아들 따라 살려고 넘어오신
어머님을 산에 혼자 두고
천지간에 산을 보며
눈물이 나서
어찌 혼자 가오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