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송강가사(松江歌辭)≫는 조선 중기의 문신 송강 정철(松江鄭澈, 1536∼1593)의 가사(歌辭)와 시조(時調)를 수록한 2권 1책의 시가집(詩歌集)이다.
필사본으로 전하는 것도 있으나, 곳곳에 일문(逸文)이 있어 온전하지 못하고, 목판본으로는 <황주본(黃州本)>, <의성본(義星本)>, <관북본(關北本)>, <성주본(星州本)>, <관서본(關西本)> 등 다섯 종이 있었다 하나, 그중 <의성본>과 <관북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책은 성주본을 저본으로 하되 관서본, 이선본과의 이기(異記)도 주석으로 대비해 여러 판본을 두루 살펴볼 수 있게 했다. 또한 ≪송강가사≫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나 ≪송강별집≫에 수록된 시조도 수록하고 주로 밝혔다. 성주본 부재 관서본, 이선본 소재 시록도 모두 수록하고 주로 밝혔다.
200자평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장진주사》…. 낯익은 제목이다.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해 우리를 고문(拷問)했던 고문(古文)들. 시험에 쫓겨 막상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하고 기계적으로 외웠지만 이들이 두고두고 명문으로 회자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송강 정철의 가사를 한데 모았다. 유려한 현대어 풀이는 물론 정확한 원문과 상세한 해제, 전문적인 주석이 함께 있어 간단한 맛보기부터 깊이 있는 연구까지 가능하다.
지은이
정철[鄭澈, 1536(중종 31)∼1593(선조 26)]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으로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의 아들이다. 어려서 인종(仁宗)의 귀인인 큰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해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후의 명종(明宗)]과 친숙해졌다. 10세가 되던 1545년(명종 즉위 원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맏형은 장류(杖流) 중에 죽고, 부 유침은 유배를 가게 되자, 그도 관북(關北)ㆍ정평(定平)ㆍ연일 등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에야 해배(解配)되어 조부(祖父)의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 당지산 아래로 이주해,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간 지냈다. 여기서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에 1등으로,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사헌부지평을 거쳐 좌랑ㆍ현감ㆍ전적ㆍ도사를 지내고, 31세에 정랑ㆍ직강ㆍ헌납을 거쳐 지평, 이어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32세에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했다. 이어 수찬ㆍ좌랑ㆍ종사관ㆍ교리ㆍ전라도 암행어사를 지내다가 40세인 1575년(선조 8) 낙향했다. 43세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해 출사했다. 이후 사간ㆍ집의ㆍ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했다. 45세 되던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지어 가사와 시조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그 뒤 전라도 관찰사ㆍ도승지ㆍ예조참판ㆍ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48세에 예조판서로 승진,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역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에 사직, 고향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했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수많은 시조ㆍ한시 등을 창작했다. 54세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 최영경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을 배제하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진주로 유배, 이어 강계로 이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부름을 받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ㆍ충청ㆍ전라 삼도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다음 해 명나라에 사은(謝恩) 행차를 다녀왔다. 이 사은사 행차가 빌미가 돼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아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寓居)하다 이듬해 포폄 많았던 일생을 마감했다. 사후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 신원되고, 1623년(인조 원년) 복원되었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산서원 별사(別祠)에 제향되고 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정치가로서는 서인의 영수로 ‘조정의 맹호(殿上之猛虎)’였으나, 시문학은 호흡에 맞고 귀에 익은 멋 겨운 장ㆍ단가(長ㆍ短歌)가 사뭇 취선(醉仙)의 풍기(風氣)요, 정한(情恨)의 자수인 연군(戀君)의 독백은 민족 정서를 접맥해 온 비장(悲壯)이다. 따라서 그의 시문학은 국문시가의 독보임에 틀림없다.
옮긴이
김갑기는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1972),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석사(1975) 및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85). 청주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송강 정철의 시문학≫, ≪漢詩로 읽는 우리문학사≫ ≪詩로 읽는 寺刹 문화≫ 외 다수가 있으며, 역주서로 ≪삼한시 귀감≫, ≪신자하 시집Ⅰ∼Ⅵ≫(공역) 등이 있다.
차례
송강가사 · 상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장진주사(將進酒辭)
송강가사 · 하
1. 교술가(敎述歌)
2. 연군(戀君)
3. 풍류(豊流)
4. 풍자(諷刺)
5. 친화자연(親化自然)
6. 자성(自省)
7. 자긍(自矜)
8. 별리(別離) · 기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버릇이 고치지 못할 병처럼 깊어져 물러나 쉬고 있더니, 강원도 관찰사의 명을 내리시니, 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갚을 길이 없구나. 연추문(延秋門) 달려 들어가 임금님을 뵙고 물러나니, 옥으로 만든 강원도 관찰사 신표가 앞에 서 있구나.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여주의 여강을 돌아 강원도 감영이 있는 원주에 도착했다. 이곳 섬강은 어디쯤인가? 치악산은 바로 여기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