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여기에 소개하는 단편 여섯 편은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소설가의 혜안으로 시대의 문제점을 잘 파악한 소설들로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문학적인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작품
<살인>은 주요섭이 중국 상해 호강대학 유학생 신분일 때 쓴 작품으로 발표 지면은 ≪개벽≫ 1925년 6월호다. 1902년생인 주요섭은 숭실중학 3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청산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해 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광복의 꿈을 안고 귀국, 평양에서 등사판 지하신문 ≪무궁화 소년회≫를 발행하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중국 유학은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이루어졌다. <살인>은 주요섭이 호강대학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해 과정을 마친 뒤 호강대학에 입학해서 작가로 나선 직후에 쓴 뜻 깊은 작품이다. 작품의 무대도 상해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의 동반자적 성격이 농후하게 느껴진다. 식민지의 빈곤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최서해의 <탈출기>는 이런 경향의 효시가 되는 작품인데, 같은 시대에 주요섭이 있었다. 최서해의 사회 비판 의식은 계급의식으로 발전해 <큰물 진 뒤>나 <홍염> 같은 작품에 이르면 노동자나 농민의 집단적 움직임까지 그려낸다. 같은 시대의 주요섭은 새로운 계급의 출현이나 무산계급의 계급적 각성에도 관심을 두었지만 특이한 것은 이 무렵 몇몇 작품 무대가 중국이라는 것이다. 발표 지면은 ≪개벽≫이었지만 작가가 작품을 쓴 곳도 배경도 중국이다.
특히 이 작품은 상해의 홍등가까지 흘러든 조선의 시골 출신 여성을 주인공으로 함으로써 조국을 잃은 우리 민족의 설움을 더욱 핍진하게 그려냈다. 재외동포 문학을 연구할 때 중국 쪽은 연변 조선족 문학(김학철, 김성휘, 리상각 등), 간도 문학(염상섭), 조선 유학생 문학(윤동주) 등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주요섭의 <인력거꾼>, <살인>, <의학박사> 등은 중국에서 창작된 한인 문학이라 할 수 있으므로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작품이다.
<의학박사>는 ≪동아일보≫에 1938년 5월 17일부터 25일까지 연재된 소설이다. 단편소설의 신문 연재도 이색적인 일이었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작품은 주요섭이 북경 보인대학(輔仁大學) 교수로 재직할 때 쓴 작품이다. 그 무렵 북경을 포함한 중국의 북쪽은 일본에 함락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요섭은 교수 신분이면서도 일제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 북경 일본 영사관 내의 유치장에 투옥되어 조사를 여러 날 받고 나왔다(같은 곳에서 훗날 이육사가 옥사한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의 작품임에도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은근히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양심’에 대해 묻는 작품으로서 그 의의가 만만치 않다.
이 소설은 의사를 주인공으로 하고서는 화자가 그 의사의 변모를 말해주는 식으로 전개되지만 실은 지식인의 변절에 대한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지식인은 대개 언론인, 법조인, 상공인, 학자, 관료 등의 삶을 살아갔다. 식민지 지배 기간이 길어지자 3·1운동 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독립운동가들은 멀리 북만주와 연해주, 중국 본토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국내에 있던 지식인들은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서 둥지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주요섭은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조선의 많은 지식인을 향해 이 소설을 통해 질문을 던진 셈이다.
두 작품이 지금까지 국내의 출판사에서 나온 어느 주요섭 선집에도 실려 있지 않은 이유를 연구자는 크게 두 가지로 본다. 주요섭의 작가로서의 출발은 ‘동반자문학’이다. 주요섭은 사회주의문학 운동에 조직의 일원으로서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문학의 대의에 동조하는 동반자문학 작품을 등단 초기에 적지 않게 썼다. 이런 관점에서 평가되어 왔더라면 <살인>은 소개되었을 테지만 연애소설 작가로 잘못 이해되어 왔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묻히고 말았다. <의학박사>에는 의사가 수술을 하다가 사람을 실수로 죽여도 그것은 ‘실수’이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채동일 박사가 나온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를 대비시키지는 않았지만 양심의 문제를 작가는 거론하고 있다. 동반자문학을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은 우리 문학사이니만큼 주요섭의 이런 작품은 옛날 문예지와 신문 지상에 실려 있을 뿐,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머지 작품들
<붙느냐, 떨어지느냐?>는 1958년 작인데, 이 소설을 보면 그때 이미 우리 사회가 입시 열풍에 휩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 수남이의 중학교 입학시험장에 간 철규는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한다. 이 소설은 작자가 유머감각을 십분 발휘한 것으로, 시험 전날 철규가 미신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미역국을 사 오고, 시험을 치르고 온 수남이는 참고서와 문제집, 교과서 등을 변소에 갖고 가 내동댕이친다. 이 밖에도 벌어지는 사건이나 대화 내용에는 독자의 실소를 유발하는 것들이 속출한다. 1950년대부터 이미 입시 지옥이었던 우리 사회의 세태를 적절히 풍자한 주요섭의 안목에 새삼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세 죽음>은 일종의 세태 풍자소설이다. 어느 날짜의 신문에 게재된 세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먼저 제시한 뒤에 전개되는 이 소설은 지난 시대 우리 사회의 위선자 열전이라 할 만하다. 전광용의 <꺼삐딴 리>와 비슷한 인물이 이 소설에도 나오는데 <세 죽음>은 제목 그대로 세 위선자의 몰락과 최후를 다루고 있다. 역사를 왜곡하고 양심을 저버린 인물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잔존해 있음을 고발한 이 소설은 친일 잔재가 청산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일정한 값어치를 지닐 수 있는 작품이다.
<나는 유령이다>는 사후에 유령이 된 아버지가 자기 딸을 자살에 이르게 한 죄를 뉘우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 소설은 아버지가 자식을 이용해 출세를 해보려는 지난 시대의 악습을 비판해 보았다기보다는 인간이 욕망이 가리키는 대로 나아가면 반드시 파멸하게 된다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소설의 의의를 한마디로 말하면 세태 풍자다.
<마음의 상채기>는 작가가 죽기 몇 개월 전에 발표한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6·25 발발 직후 남으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적 치하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목숨을 겨우 건진 출판사 편집장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잠시 동안 수복되자 열차를 타고 피난을 간다. 중공군 침입에 의한 1·4후퇴 때였다. 아내와 두 자식, 두 조카를 데리고 부산까지 피난을 가는 동안 겪는 참담한 일들이 이 소설의 기둥 줄거리다. 이 소설은 사실성이 뛰어나 그만큼 주제 의식이 뚜렷하고 묘사의 핍진성이 뛰어난 수작이다. 6·25 때 인민군 치하에 있던 서울의 상황을 잘 알 수 있게 하므로, 역사적인 의의도 있는 작품이다.
200자평
시대를 정직하게 읽고 제대로 이해한 한 주요섭의 노력이 집중된 작품 6편을 소개한다.
주요섭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통해 작가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
지은이
주요섭은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21년에 등단해 우리 문단의 주요 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 문단에서는 아주 드물게,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작가다. 17세에 도일, 청산학원에 다니는 동안 일본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등단작 <깨어진 항아리>를 비롯해 1925년까지 발표한 <추운 밤>, <기적>, <인력거꾼>, <살인> 등이 신경향파적인 색채를 띨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경향파’의 대표적인 작가로 주요섭이 거론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의 학업은 중국 상해 호강대학 졸업, 미국 스탠퍼드대학 석사 과정 수료로 이어졌고 1934년부터 1943년까지 북경 보인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작품의 무대는 당연히 한국과 일본, 중국, 미국 등이 망라되어 보통 넓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광복 이후의 활동은 범문단적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발행한 ≪코리아 타임스≫의 주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총장과 위원장,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는 동안 그는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에는 신경을 많이 썼지만 자기 작품의 심화와 확대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학 강단에 섬으로써 작품 쓰기를 소홀히 한 탓인지 일제 강점기 때 쓴 주옥편까지도 문학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느낌이 든다. 하지만 주요섭은 1950∼1960년대에 아주 활발히 활동했다. 1935년 작 <사랑 손님과 어머니>가 그에게 준 대중적인 인지도가 1950∼1960년대의 활동에 대한 탐색을 가로막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세 편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중편소설은 평가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 주요섭론은 이제부터 새로이 쓰여야 하는데 이 책은 첫 단추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엮은이
이승하는 1960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김천에서 성장했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문학 박사)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 ≪공포와 전율의 나날≫ 등이 있고, 시론집으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10대 명제≫,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한국 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차례
살인(殺人)
의학박사(醫學博士)
붙느냐, 떨어지느냐?
세 죽음
나는 유령이다
마음의 상채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깊고 깊은 지심에서 터져 나와 수만 리 땅속 거리를 용솟음쳐 올라 땅 껍데기에까지 와서 흐르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쉴 새 없이 흐르는 이 온천물이 야비한 자들의 피부병을 고쳐주고 환멸에 빠진 지성인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 것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나 아무런 편견도 없이 영원히 자비를 베풀어주는 이 온천은 이곳을 찾아오는 자들을 무조건 애무해 주고 위로해 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마음의 상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