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1903년 평남에서 태어나 남북분단 이후에도 그대로 북쪽에 머물렀던 작가 최명익의 작품 세 편을 실었다.
최명익의 대표적인 작품 <심문>, <무성격자>, <장삼이사> 등은 근대적 가치 체계를 발본적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최명익 소설은 찾아야 할 그 어떤 ‘별빛’도 잃어버린 채 “제 심정을 바칠 곳이 없어서”(<심문>) 스스로 죽어 가는 인물들의 비망록이다. 그들의 자멸은 근대적 가치 체계에 대한 항의이자 비타협적인 저항인 셈이다.
<심문>은 비타협적인 저항이 왜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로 드러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작품은 예의 현실을 수긍하기 힘든 자의 유의미한 존재 지점이 내면임을 보여 준다. 동시에 내면만큼 무기력한 것도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작품 속 인물들은 어쩔 수 없는 운명에서 벗어나 상징적 자살 행위로 스스로의 상징적 좌표를 새로 점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선택은 가혹한 현실에서 강요된 선택을 자신의 선택으로 돌려놓는 영웅적 투쟁의 몸짓인 셈이다. 그런데 항의와 저항이 주체 바깥의 대상들을 향하는 데 그쳤다면 최명익의 소설은 비판의 잣대에 스스로 갇히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세계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댄디즘적 취향의 발현이 아니다.
최명익의 소설은 모순된 현실 속에서 모순된 정체성을 갖게 된 인물들의 자기 파멸의 한계 또한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소설 속 지식인적 주인공은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해 깨닫고 있다. 현실과 함께 마모되어 가는 인물의 모습은 개인으로서 자신을 통렬하게 자각해 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개인성에 대한 자의식적 인식이 향하고 있는 이 역설적 인식을 잘 보여 주는 대표작으로는 <무성격자>를 들 수 있다.
해방 전 마지막으로 집필한 소설인 <장삼이사>에서는 다수 대중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살필 수 있다.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포주와 여인의 폭력적 상황, 그리고 이에 잔인하게 동조하는 대중들의 모습에는 예의 생활인들의 생기뿐 아니라 현실 타협적인 대중에 대한 의구심이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장삼이사>가 다수 대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는 이전 소설과 다른 듯하지만 그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여전하다. 작가적 분신들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스스로의 내적 원인들에 의해 삶을 선택하는 인물 유형을 가진다면 대중은 외부적 힘의 무게 중심에 따라 자신들의 행위를 결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200자평
1903년 평남 출생으로 일찍부터 ‘이광수의 문학은 시대상을 관찰함에 경제학적 사회과학적 근거를 두지 않은 관념적인 것’이라는 문학관을 가졌던 재북 작가 최명익. “제 심정을 바칠 곳이 없어서” 스스로 죽어 가는 인물들을 소설로 표현했다. 해방정국 때인 1947년에 서울 을유문화사에서 작품집을 한 권 간행했다. 여기 실렸던 작품 세 편을 감상해 보자.
지은이
최명익(崔明翊, 1903∼?)은 평남 강서군 증산면 고산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산삼 교역상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최명익이 평양고보에 입학한 이듬해에 사망한다. 1921년 일본 유학을 통해 도스토옙스키 문학에 심취한다. 1928년 최명익은 홍종인, 김재광, 한수철 등과 함께 동인지 ≪백치≫를 만들고 여기에 <희련시대>, <처의 화장>을 발표한다. 이때 유방(柳妨)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콩트 <붉은 코>, <목사>, 평론 <이광수 씨의 작가적 태도를 논함> 등을 집필한다.
1936년 최명익은 <비 오는 길>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고 “도스토옙스키의 수법”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작가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무성격자>, <역설>, <봄과 신작로>, <폐어인>, <심문>, <장삼이사> 등 일제강점기 동안 총 일곱 편의 소설을 창작한다. 그의 작품은 “비록 자조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 자조는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활”(백철)을 찾으려는 것이며 “결말을 맺는 기술이 매우 수준이 높고, 아울러 인생의 순수성과 청신성을 빚어내는 데 성공”(김동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제 말을 경과하면서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심리적 고뇌로서는 “이러한 세계에서는 더 배겨낼 수가 없고 따라서 자기를 그런 투로 학대할 필요나 이유가 없다”(<레프 톨스토이에 대한 단상>)라고 진단한다. 지식인이라는 한계에 봉착한 그는 <장삼이사>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민중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해방 후 ‘평양예술문화협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이 단체에서 간행된 ≪관서 시인집≫이 쉬르레알리슴의 시라는 점이 문제가 되어 공산주의 계열의 비평가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게 된다. 이때 최명익은 김조규, 양명문 등과 함께 자기비판의 과정을 거쳐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1947년 최명익은 단편집 ≪맥령≫을 문화전선사에서 출간하며, 남한의 을유문화사에서 일제하의 작품을 모은 ≪장삼이사≫를 출간한다. 1956년 발표한 역사소설 ≪서산대사≫는 북한 문예의 모범작으로 평가받았다.
엮은이
이훈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부와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청준 소설의 알레고리 기법 연구>(1999)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2007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문학상에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주요 평론으로는 <지옥의 순례자, 역설적 상실의 제의 – 편혜영론>, <부재, 찰나, 생성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냉장고를 친구로 둔 인간, 피뢰침이 된 인간>, <생의 환상, 공전의 미학 – 박완서론>, <사랑을 부르는 매혹적 요구>, <부정의 부정 – 허혜란론>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차례
심문(心紋)
무성격자(無性格者)
장삼이사(張三李四)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만주루 북지루 댕겨보문 돈벌인 색씨 당자가 제일인가 보둔.”
당꼬바지가 불쑥 이런 말을 시작하였다. 모두 덤덤히 앉았던 사람들은 마침으로 흥미 있는 이야기꺼리가 생겼다는 듯이 시선이 그에게로 몰리자 그의 옆에 앉은 가죽 짜켙이 그 말을 받았다.
“돈벌이야 작히 좋은가요, 하지만 자본이 문제거든, 색씨 하나에 소불하 돈 천 원은 들어야 한다니까.”
“이것이라니 아무리 요좀 돈이구루서니, 천 환이문 만 냥이 아니요.”
이렇게 놀란 것은 물론 곰방대 영감이었다. 그러자 아까 그 실수를 한 젊은이가,
“요즘 돈 천 환이 무슨 셍명 있나요, 웬만한 달구지 소 한 놈에두 천 원을 안 했게 그럼네까.”
하고 이번에는 조심히 제 발 뿌리에다 침을 뱉았다.
“그랜 해두, 넷날에야 원틀루 에미나이보단 소끔새가 앞셋디 될 말인가.”
“녕감님, 건 촌에서 밋메누리 감으루 딸 팔아먹던 넷말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