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경희>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작가로서 나혜석의 활동은 1918년 ‘동경여자친목회’가 낸 <여자계>제2호에 단편소설 <경희>(1918. 3)를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경희>는 일본 유학 중에 귀국한 주인공 ‘경희’가 조선적 현실에서 신여성의 이상을 실현하는 가운데 겪는 갈등과 고뇌를 실감 있게 그린 작품이다. 소설의 구성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및 사건의 전개가 긴밀하고 균형감이 있으며, 문제 설정이나 갈등 해결의 과정도 생생한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특히 생생한 대화체의 구사에서, 구여성으로 하여금 신여성의 각성된 삶의 방식에 동의하게 만드는 설득의 수사학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다. 또한 주인공의 이상을 주창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의 관습에 부딪혀 안주하고자 하는 갈등과 고민까지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계몽주의적이지만 이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경희>의 주제 의식은 봉건사회의 가부장적 구습을 타파하고 여자에 대한 편견에 맞서 인간의 평등과 자율성을 확인하고 실천하는 근대적 주체의 확립이다. ‘경희’는 이러한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미약한 모습에 대해 반성하기도 하고, 주어진 관습의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타협의 심리에 유혹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주인공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과 괴리로 인한 번민을 겪지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회생(回生)한 손녀(孫女)에게>
나혜석은 <여자계> 제3호에 <회생(回生)한 손녀(孫女)에게>(1918. 9)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화자가 중병에서 회복한 손녀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애절하게 표현하면서, 폐병으로 투병하던 과거 애인에 대한 자책감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다. 이 부분은 작가 자신이 공부 때문에 간호하지 못해 폐병으로 사망했다고 생각하는, 첫사랑의 상대 최승구와의 실제 체험을 승화시키고 있다. 1인칭 주인공의 독백으로 일관하고 있어 소설적 구성이 허약하다는 단점이 있으나, 나이팅게일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천사의 상(像)을 제시하여, 작가가 내면에 품은 민족에 대한 헌신적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규원(閨怨)>
<신가정> 창간호에 발표한 <규원(閨怨)>(1921. 7)은 부잣집 양반의 딸인 한 여성이 남편 사망 이후 ‘장 주사’라는 남자의 농간과 시가 및 친가의 구습적인 편견에 내몰려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인물의 형상화나 사건의 전개보다는 주인공의 회고담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점에서 구성상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구여성의 불행한 생애를 통해 봉건적 관습과 편견에 대한 부정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가 <신가정> 제2호에 게재될 것으로 예고되어 있으나, 아쉽게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원한(怨恨)>
<조선문단>에 발표한 <원한(怨恨)>(1926. 4)은 아버지가 친구와 술자리에서 맺은 혼약으로 철없고 어린 남편과 결혼한 한 여성의 수난사를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과부가 되고 시아버지의 친구에게 봉변을 당한 뒤 그의 첩이 되어 온갖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가출하여 광주리장수로 전락하고 만다. 가부장제의 남성중심주의적 윤리 구조에 의해 일방적인 희생과 수탈을 강요받는 구여성의 전형적인 생애를 보여줌으로써 전통적 관습과 도덕의 횡포를 고발한다는 점에서, <규원>과 맥락을 같이 하는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현숙(玄淑)>
1936년에 <삼천리>에 발표한 <현숙(玄淑)>은 신여성 ‘현숙’이 카페 여급으로 있으면서 ‘끽다점(다방)’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투자할 남성을 구하는 과정을 그린다. 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영과 투자의 개념을 내세우는 주인공 ‘현숙’의 성격은 독특하며 복합적이다. ‘현숙’은 사업의 주체로서 경영과 투자라는 자본의 개념을 체득하고 있는 점에서 신여성적이지만, 사회적 성공을 위해 일정한 서비스를 해주며 투자할 남자들을 만나는 처세술을 가진 점에서는 세속적인 인물이다. 또한 같은 여관에 투숙하는 가난한 노시인 및 젊은 화가와 진실한 마음을 주고받는 인물로도 형상화된다. 이 작품은 비록 구성상의 긴밀함이 부족하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을 서술자의 진술이나 화자의 독백적 회고담이 아닌 인물 간의 생생한 대화체로 전개하면서 인물들의 복합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어머니와 딸>
1937년에 <삼천리>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은 여관을 운영하는 ‘주인마누라’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윗감 ‘한운’과 결혼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버티는 딸 ‘영애’의 행동과, 이것을 하숙하며 글을 쓰는 독신 여성 소설가 ‘김선생’의 탓으로 여기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어 구성이 단순한 편이지만, 연극 대사의 활용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만큼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체로만 사건과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기법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생생하게 인물의 성격을 형상화하지는 못했어도, 이중적 성격의 인물을 등장시켜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시선을 통해 신여성의 이상과 그 내면에 자리한 위선의 양상까지 탐색하려 한 점에서, 작품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0자평
나혜석은 일련의 여성 소설을 통해 한국 근대 초창기의 파란만장한 삶의 체험에서 얻어진 주제 의식을 드러냈다. 가부장적인 구습에 대한 비판과 여성 해방에 대한 이상과 그 이상이 현실에 부딪쳐 좌절되거나 굴절되는 양상을 그려 내면서, 신여성의 생활적·심리적 위선을 포착한다.
지은이
정월(晶月)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시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1914년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제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고, 오빠 경석의 친구인 최승구와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15년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여 학비를 마련하고, 11월 복학하면서 고등사법과 1학년으로 전입했으나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12월 아버지가 사망하고, 애인 최승구는 결핵에 걸려 귀국하여 요양을 한다. 1916년 최승구가 사망한 뒤 오빠 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김우영과 교제를 시작한다. 1918년 3월 <여자계> 제2호에 나혜석의 대표작이자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고, ‘H.S.’라는 필명으로 시 <광(光)>을 발표한다.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귀국하여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건강이 안 좋아 그만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한다. 9월 <여자계> 제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한다.
1919년 3월 박인덕·신준려·황애시덕·김마리아 등과 3·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의논하고, 개성과 평양으로 가서 자금 모금과 만세 운동 확산을 위해 이정자·박충애와 만나 의논한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난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고 그와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온다.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연다. 4월 첫딸을 낳고, 7월 <신가정> 창간호에 <규원>을 발표한다. 9월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고, 1922년 3월 여자 야학 설립을 주도한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한 <봄>·<농가>가 입선한다. 1923년 1월 첫딸을 임신하여 낳고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육체적 변화를 솔직히 기록한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한다. 이후 해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하며,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天后宮)>이 특선, <지나정(支那町)>이 입선한다. 1926년 4월 <조선문단>에 <원한>을 발표한다.
1927년 만주 안동현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동래 시집에서 지내다가, 6월 남편과 함께 구미 여행길에 오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스위스·벨기에·네덜란드 등을 여행하고, 법률 공부를 위해 남편이 베를린으로 간 사이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한다. 10월 천도교 도령(道令)으로 파리에 온 최린을 만나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29년 귀국하여 9월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연다. 1930년 김우영이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파리 시절 최린과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나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이혼한다.
이후 나혜석은 실의를 딛고 그림 작업에 몰두하여 계속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32년 금강산 해금강에서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불의의 화재로 10여 점밖에 건지지 못해 충격을 크게 받는다. 1933년 생계와 그림 활동을 위해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고 운영한다. 1934년 김우영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서술한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 8∼9)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9월에는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는다. 1935년 <신생활에 들면서>(<삼천리>, 1935. 2)를 발표하여 구습과 인습에 얽매인 정조 개념의 해체를 다시 주장한다.
1936년 소설 <현숙(玄淑)>(<삼천리>, 1936. 12)을 발표하고, 1937년 소설 <어머니와 딸>(<삼천리>, 1937. 10)을 발표한다. 김일엽을 찾아가 수덕사 밑의 수덕 여관에 기거하면서 해인사·다솔사 등을 돌아다니며 지인을 찾아 서울을 오가기도 한다. 이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그림 작업과 산문 쓰기를 병행한다. 1940년 김우영이 아이들을 만나는 것조차 방해하자 실의에 빠지고, 1944년 수덕사를 떠난 나혜석은 아이들이 있는 서울에 자주 나타나고, 딸 나영에게 얼마간 의탁하기도 하고, 서울의 오빠 집에 갔다가 쫓겨나기도 한다. 10월 오빠 경석의 주선으로 서울 인왕산 청운 양로원에 맡겨졌다. 1948년 12월 10일 원효로 시립자제원에서 사망한다.
엮은이
오형엽(吳瀅燁)은 1965년 2월 7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현대시> 신인상을 받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집으로 ≪신체와 문체≫(문학과지성사, 2001), ≪주름과 기억≫(작가, 2004), 저서로 ≪한국 근대시와 시론의 구조적 연구≫(태학사, 1999), ≪현대시의 지형과 맥락≫(작가, 2004), ≪현대문학의 구조와 계보≫(작가, 2010) 등이 있으며, 역서로 ≪이성의 수사학≫(고려대출판부, 2001)이 있다. 2002년 제3회 ‘젊은 평론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현대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수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차례
경희
회생(回生)한 손녀(孫女)에게
규원(閨怨)
원한(怨恨)
현숙(玄淑)
어머니와 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아바지가 “게집애라는 거슨 시집가셔 아들딸 낫코 媤父母 셤기고 남편을 恭敬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거슨 녯날 말이야요. 只今은 게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以上에는 못할 거시 업다고 해요. 사내와 갓히 돈도 버를 수 잇고 사내와 갓히 벼슬도 할 수 잇셔요. 사내 하는 거슨 무어시든지 하는 世上이야요” 하든 生覺을 하며
-<경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