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천년의 세월을 넘어 생생하게 부활한 역사의 기록, 《북몽쇄언》 세계 최초 완역!
《북몽쇄언(北夢瑣言)》은 ‘몽택(夢澤) 북쪽에서 기록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라는 겸손한 제목과 달리, 당나라 말부터 오대십국을 거쳐 북송 초에 이르는 격동기의 중국사를 생생하게 담아낸 귀중한 역사서다. 문인 손광헌(孫光憲)이 직접 보고 듣고 수집한 399조의 방대한 이야기는 당시의 정치적 격변, 문인들의 풍류와 고뇌, 그리고 생생한 사회 풍속까지 아우르며 1000년 전의 세상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이 책은 단순한 일화집을 넘어선 깊이 있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구오대사(舊五代史)》,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 구양수(歐陽修)의 《신오대사(新五代史)》 등 정통 역사서들이 《북몽쇄언》의 기록을 인용하며 그 신뢰성을 입증했다. 또한 당나라와 오대의 유명 문인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작품 배경을 알려 주는 문학사적 보고(寶庫)이기도 하며, 후대 소설과 희곡 창작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현존하는 20권본에 실리지 않은 90조의 귀중한 일문(逸文)을 《태평광기(太平廣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어, 사라질 뻔했던 역사의 조각들을 복원하는 데 기여한다.
손광헌은 단순한 기록자를 넘어, 날카로운 관찰자이자 비판자였다. 그는 환관의 전횡, 과거 부정, 관리들의 부패와 같은 사회 부조리를 가감 없이 폭로하며 후세에 경계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그의 ‘보광자왈(葆光子曰)’이라는 평어는 사건의 이면을 꿰뚫는 통찰을 보여 주며, 역사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이번에 선보이는 《북몽쇄언》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초의 완역본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대중적 의미가 매우 크다. 옮긴이 김장환 교수는 청대 《운자재감총서(雲自在龕叢書)》본을 저본으로 해서 본문 20권 327조와 《태평광기》에서 집록한 일문 4권 90조, 그리고 저본에 실리지 않은 일문보(逸文補) 1조까지 충실히 번역하고 상세한 주석과 교감을 더했다. 또한 역대 서지 기록과 서문, 발문 등을 부록으로 실어 독자들의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다. 자얼창(賈二强)의 교점본을 주요 참고 자료로 활용해 학술적 완성도를 높였다. 혼란과 변화의 시대를 기록한 이 귀중한 문헌을 통해, 독자들은 과거의 지혜를 배우고 현재를 살아가는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200자평
당나라 말부터 북송 초까지의 역사를 담은 손광헌의 《북몽쇄언》을 세계 최초로 완역 소개한다. 399조의 방대한 이야기는 당시 정치, 문인, 사회상을 생생히 보여 주며, 사료 및 문학적 가치가 높고 날카로운 사회 비판도 담고 있다. 이번 완역본은 청대 《운자재감총서》본을 저본으로 본문과 일문, 일문보까지 망라하고 상세 주석을 더해 1000년 전 역사의 목소리를 되살렸다. 《북몽쇄언》 1권에는 권1∼권10을 수록했다.
지은이
손광헌
《북몽쇄언(北夢瑣言)》의 찬자 손광헌(孫廣憲, ?∼968)은 자가 맹문(孟文)이고 자호가 보광자(葆光子)이며 능주(陵州) 귀평[貴平 :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런서우현(仁壽縣)] 사람이다. 오대 후당(後唐) 때 능주판관(陵州判官)이 되어 명성이 있었다. 후당 명종(明宗) 천성(天成) 연간(926∼930) 초에 강릉(江陵)으로 피난했는데, 이때 고계흥[高季興 : 오대십국 형남(荊南)의 개국 군주]이 형남을 할거하고 사방의 선비를 초빙하자, 손광헌은 양진(梁震)의 천거를 받아 장서기(掌書記)로 들어갔다. 고계흥이 죽고 그의 아들 고종회(高從誨 : 형남의 제2대 군주)가 즉위했을 때 양진이 사직을 청하자, 모든 정사를 손광헌에게 맡겼다. 그 후로 손광헌은 고보융(高保融)·고보욱(高保勗)·고계충(高繼沖)을 차례로 섬기면서 형남절도부사(荊南節度副使)·조의랑(朝議郞)·검교비서소감(檢校秘書少監)·시어사중승(試御史中丞)을 역임했다. 북송 태조(太祖) 건덕(乾德) 원년(963)에 모용연쇠(慕容延釗) 등이 낭주(朗州)의 난을 평정하면서 형남에 길을 빌리고자 했는데, 손광헌이 고계충에게 세 주(州)의 땅을 바치고 송나라에 귀항(歸降)하라고 권했다. 태조는 손광헌의 공을 훌륭히 여겨 그를 황주자사(黄州刺史)에 제수하고 등급을 높여 상을 하사했다. 당시 재상이 손광헌을 학사(學士)로 천거했는데, 미처 그를 불러들이기 전에 건덕 6년(968)에 병사했다.
손광헌은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특히 학문에 매진했으며, 수천 권의 책을 모아 때때로 스스로 베껴 쓰면서 열심히 교감하는 일을 늙도록 그만두지 않았다. 저술을 좋아해 《북몽쇄언》 외에 《속통력(續通歷)》 10권, 《형대집(荊臺集)》 30권, 《공호편완(鞏湖編玩)》 3권, 《귤재집(橘齋集)》 2권, 《필용집(筆傭集)》 2권, 《잠서(蠶書)》 2권을 지었는데, 《북몽쇄언》만 전하고 나머지는 모두 망실되었다. 손광헌은 또 사(詞)에도 뛰어났는데, 오대 후촉(後蜀)의 조숭조(趙崇祚)가 편찬한 《화간집(花間集)》에 그의 사 61편이 수록되어 있다. 《송사(宋史)》 권483 〈형남고씨세가(荊南高氏世家)〉와 《십국춘추(十國春秋)》 권102에 그의 전(傳)이 있다.
옮긴이
김장환
김장환(金長煥)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 남북조 지인 소설 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방문학자, 같은 대학교 페어뱅크 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방문학자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이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중국 문학의 흐름》, 《중국 문학의 향기》, 《중국 문학의 향연》, 《중국 문언 단편 소설선》, 《유의경(劉義慶)과 세설신어(世說新語)》, 《위진세어 집석 연구(魏晉世語輯釋硏究)》, 《동아시아 이야기 보고의 탄생−태평광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 연극사》, 《중국 유서 개설(中國類書槪說)》, 《중국 역대 필기(中國歷代筆記)》, 《세설신어(世說新語)》(전 3권),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전 4권), 《세설신어 성휘운분(世說新語姓彙韻分)》(전 3권), 《태평광기(太平廣記)》(전 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 8권),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전 16권), 《봉신연의(封神演義)》(전 9권), 《당척언(唐摭言)》(전 2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고사전(高士傳)》, 《어림(語林)》, 《곽자(郭子)》, 《속설(俗說)》, 《담수(談藪)》, 《소설(小說)》, 《계안록(啓顔錄)》, 《신선전(神仙傳)》, 《옥호빙(玉壺氷)》, 《열이전(列異傳)》, 《제해기(齊諧記)·속제해기(續齊諧記)》, 《선험기(宣驗記)》, 《술이기(述異記)》, 《소림(笑林)·투기(妬記)》, 《고금주(古今注)》,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원혼지(寃魂志)》, 《이원(異苑)》, 《원화기(原化記)》, 《위진세어(魏晉世語)》, 《조야첨재(朝野僉載)》(전 2권),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전 2권), 《옥당한화(玉堂閑話)》, 《당궐사(唐闕史)》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에 관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있다.
차례
북몽쇄언서(北夢瑣言序)
권1
1-1(001) 선종이 진사라고 칭하다(宣宗稱進士)
1-2(002) 이 태위가 영민하고 준수하다(李太尉英俊)
1-3(003) 정광이 세금을 면제받다(鄭光免稅)
1-4(004) 다시 불교를 일으키다(再興釋教)
1-5(005) 정씨의 딸이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하다(鄭氏女廬墓)
1-6(006) 일본국 왕자의 바둑 실력(日本國王子棊)
1-7(007) 두예를 논박하다(駁杜預)
1-8(008) 이 태위가 백 소부를 억압하다(李太尉抑白少傅)
1-9(009) 훌륭한 재주를 지닌 선비 우승유(牛僧孺奇士)
1-10(010) 영호호가 진사 응시자로 미리 선발되다(令狐滈預拔文解)
1-11(011) 유삼복이 삼생을 기억한 일(劉三復記三生事)
1-12(012) 뿔이 빠진 무소(禿角犀)
1-13(013) 위문정공의 홀(魏文貞公笏)
권2
2-1(014) 피일휴가 상소문을 바치다(皮日休獻書)
2-2(015) 재상이 은총을 믿고 권세를 부리다(宰相怙權)
2-3(016) 낙산인이 왕정주에게 알려 주다(駱山人告王庭湊)
2-4(017) 관리 임명을 잘못해 도적을 초래하다(授任致寇)
2-5(018) 고병이 바닷길을 개착하다(高騈開海路)
2-6(019) 빈한한 세 사람을 과거에 급제시키다(放孤寒三人及第)
2-7(020) 문종이 왕기를 중시하다(文宗重王起)
권3
3-1(021) 노조가 진사 장원이 되다(盧肇爲進士狀元)
3-2(022) 장난삼아 재상 필함의 이름을 고치다(戲改畢諴相名)
3-3(023) 단 상이 황금 연꽃 동이에 발을 씻다(段相踏金蓮)
3-4(024) 상국 이고언이 친척 유씨에게 골탕 먹다(李固言相國爲柳表所誤)
3-5(025) 두빈공이 친척을 구휼하지 않다(杜邠公不恤親戚)
3-6(026) 태사 이광안이 훌륭한 사윗감을 고르다(李光顔太師選佳壻)
3-7(027) 왕문공이 손을 모으고 잠들다(王文公叉手睡)
3-8(028) 하중에서 재상 유첨을 전별하다(河中餞劉相瞻)
3-9(029) 이씨의 상서로운 홰나무(李氏瑞槐)
3-10(030) 고 태위가 예불하는 중을 처결하다(高太尉決禮佛僧)
3-11(031) 중서령 왕탁이 황소를 막다(王中令鐸拒黃巢)
3-12(032) 노 시중의 두건(路侍中巾裹)
3-13(033) 상서 이훈이 발분하다(李勳尙書發憤)
3-14(034) 상서 정우의 비단 반소매 옷(鄭愚尙書錦半臂)
3-15(035) 재상 위주는 족곡옹이다(韋宙相足穀翁)
3-16(036) 상서 이당의 대바구니(李當尙書竹籠)
3-17(037) 오행로가 요강을 따뜻하게 하다(吳行魯溫溲器)
3-18(038) 최 시중이 형옥을 줄이다(崔侍中省刑獄)
3-19(039) 사인 유태가 선조에게 제사 지내지 않다(劉蛻舍人不祭先祖)
3-20(040) 두심권이 풍연을 배척하다(杜審權斥馮涓)
3-21(041) 못난 자식의 세 가지 변화(不肖子三變)
3-22(042) 설보손이 경박하다(薛保遜輕薄)
3-23(043) 진회의 〈당랑부〉(陳會〈螳蜋賦〉)
3-24(044) 유 복야의 〈여지도〉(劉僕射〈荔枝圖〉)
3-25(045) 조 대부를 무자비라 부르다(趙大夫號無字碑)
권4
4-1(046) 조 영공의 붉은 총채(趙令公紅拂子)
4-2(047) 설씨의 아들이 군대의 의용을 갖추다(薛氏子具軍儀)
4-3(048) 재상 손악이 대범하다(孫偓相通簡)
4-4(049) 대부 유빈이 모향을 칭찬하다(柳玭大夫賞牟黁)
4-5(050) 상서 손규가 거해당하다(孫揆尙書鋸解)
4-6(051) 재상 최윤의 겨드랑이에 생겨난 글자(崔胤相腋文)
4-7(052) 여러 대덕이 좋아하는 것(諸重德好尙)
4-8(053) 필함의 외숙이 분수를 알다(畢舅知分)
4-9(054) 사군 양위가 양원을 세 번 다스리다(楊蔚使君三典洋源)
4-10(055) 요망한 사람이 진 복야를 사칭하다(妖人僞稱陳僕射)
4-11(056) 조서를 끌어안고 곡한 유 사인의 일(哭麻劉舍人事)
4-12(057) 상서 채경이 고씨 형제를 발탁하다(蔡京尙書拔顧氏昆弟)
4-13(058) 재상 육의가 6월에 급제하다(陸扆相六月及第)
4-14(059) 시랑 오융의 문장(吳融侍郞文筆)
4-15(060) 천황해를 깨뜨리다(破天荒解)
4-16(061) 성 영공이 뱀에게 몸이 감기다(成令公爲蛇繞身)
4-17(062) 재상 장준이 반적을 격파하다(張濬相破賊)
4-18(063) 설 징주가 홀을 흔들다(薛澄州弄笏)
4-19(064) 서악신이 장거를 죽이다(西嶽神斃張簴)
4-20(065) 유중영의 여종이 개거원을 비웃다(柳婢譏蓋巨源)
4-21(066) 조 사유와 유 대부가 화창하다(趙師儒與柳大夫唱和)
4-22(067) 《조계도》의 진사 방문(《祖系圖》進士牓)
4-23(068) 온정균과 이상은이 이름을 나란히 하다(溫李齊名)
4-24(069) 최씨의 딸이 정조를 잃고 주보의 부인이 되다(崔氏女失身爲周寶妻)
4-25(070) 최우창이 소를 알지 못하다(崔禹昌不識牛)
4-26(071) 장서가 두순학을 놀리다(張曙戲杜荀鶴)
권5
5-1(072) 영호 공이 은밀히 상주하다(令狐公密狀)
5-2(073) 이원이 조당을 놀리다(李遠譏曹唐)
5-3(074) 중서성의 변방 이민족 사람의 일(中書蕃人事)
5-4(075) 서 상이 성 중령을 조롱하다(徐相譏成中令)
5-5(076) 위 상서가 노 상을 알아보다(韋尙書鑒盧相)
5-6(077) 설봉이 왕조를 칭찬하다(薛逢賞王助)
5-7(078) 진도의 《벽서》(陳陶《癖書》)
5-8(079) 양삭의 산수(陽朔山水)
5-9(080) 회해와 절서의 분규를 해결한 조서(淮浙解紛詔)
5-10(081) 오융의 천행(吳融天幸)
5-11(082) 심순과 장응의 출중한 인물(沈·蔣人物)
5-12(083) 장준·악붕귀와 전군용의 내외관의 일(張濬·樂朋龜與田軍容中外事)
5-13(084) 설 소사가 내외관을 거절한 일(薛少師拒中外事)
5-14(085) 양성의 양어머니(楊晟義母)
5-15(086) 성 영공의 화주재(成令公和州載)
5-16(087) 위 태위가 서천을 토벌하다(韋太尉伐西川)
5-17(088) 장노봉의 불행(章魯封不幸)
5-18(089) 배씨가 재가하다(裴氏再行)
5-19(090) 문을 닫고 남만을 피하다(閉門避蠻)
5-20(091) 고 태위의 속임수(高太尉機詐)
5-21(092) 장도고의 묘표(張道古題墓)
5-22(093) 《소거자》에 대해 서술하다(叙《巢居子》)
5-23(094) 나곤이 서천절도사[왕건]의 초징에 나아가지 않다(羅衮不就西川辟)
5-24(095) 고측의 계사(高測啓事)
5-25(096) 부재와 후핵이 돌아가 은거하다(符載·侯翮歸隱)
권6
6-1(097) 오상의 일(吳湘事)
6-2(098) 배상이 우전국에서 태어난 일(裴相生於于闐國事)
6-3(099) 위씨의 딸이 유겸의 배필이 된 일(韋氏女配劉謙事)
6-4(100) 상서 전포의 일(田布尙書事)
6-5(101) 이 태위가 적양공의 사당 중수를 청한 일(李太尉請修狄梁公廟事)
6-6(102) 동창 공주의 일(同昌公主事)
6-7(103) 후창업의 표문(侯昌業表)
6-8(104) 이 상시가 도술을 만나다(李常侍遇道術)
6-9(105) 육 상공이 술을 권한 일(陸相公勸酒事)
6-10(106) 배철과 정광도가 양왕을 옹립한 일(裴·鄭立襄王事)
6-11(107) 전 군용이 위 태위에게 격서를 보내다(田軍容檄韋太尉)
6-12(108) 주박과 이사망이 벼락 승진하다(朱·李驟進)
6-13(109) 이군옥의 경박한 일(李羣玉輕薄事)
6-14(110) 가사로 스스로 즐기다(以歌詞自娛)
6-15(111) 유태가 영호 상에 대해 상주하다(劉蛻奏令狐相)
6-16(112) 육구몽이 추증받다(陸龜蒙追贈)
6-17(113) 안 급사의 묘지명(顔給事墓銘)
6-18(114) 이계의 행장(李磎行狀)
6-19(115) 백 태부의 묘지명(白太傅墓銘)
6-20(116) 환관이 직무를 바꿔 새롭게 만들다(內官改創職事)
6-21(117) 나은과 고운의 부침(羅·顧升降)
6-22(118) 이기가 나뭇잎에 글을 쓰다(李琪書樹葉)
6-23(119) 두순학이 한림원에 들어가다(杜荀鶴入翰林)
6-24(120) 악공 관소홍(樂工關小紅)
6-25(121) 손 내자(孫內子)
권7
7-1(122) 맹호연과 조하가 시로 뜻을 잃다(孟浩然·趙嘏以詩失意)
7-2(123) 재상 정계의 시(鄭綮相詩)
7-3(124) 내붕의 시(來鵬詩)
7-4(125) 이 학사가 지은 부의 조짐(李學士賦讖)
7-5(126) 노연양의 시가 세 번 칭찬받다(盧詩三遇)
7-6(127) 이연의 행권(李渷行文卷)
7-7(128) 정준이 군중에서 지은 글을 모으다(鄭準集軍書)
7-8(129) 정준이 진영을 조롱하다(鄭準譏陳詠)
7-9(130) 왕초의 전주문(王超牋奏)
7-10(131) 이상은이 〈진검표〉의 초안을 잡다(李商隱草〈進劒表〉)
7-11(132) 상국 고숭문이 눈을 읊다(高崇文相國詠雪)
7-12(133) 동정호 시(洞庭湖詩)
7-13(134) 고섬이 시로 과거에 급제하다(高蟾以詩策名)
7-14(135) 위열과 두순학의 기개(韋·杜氣槩)
7-15(136) 양진이 관록이 없다(梁震無祿)
7-16(137) 하후생이 유 복야의 일을 말하다(夏侯生說劉僕射事)
7-17(138) 조상이 꿈에 삭발하고 승려가 되다(曹相夢剃度)
7-18(139) 현묘한 덕이 감응하다(玄德感)
7-19(140) 유도제가 그윽한 창에서 꿈을 꾸다(劉道濟幽牕夢)
권8
8-1(141) 이 태위가 단 소상에게 편지를 보내다(李太尉與段少常書)
8-2(142) 손 복야가 술을 붓고 고수레하다(孫僕射酹酒)
8-3(143) 두 조정 관리가 이름을 가지고 놀리다(二朝士以名取戲)
8-4(144) 장인귀가 저승에서 질책받다(張仁龜陰責)
8-5(145) 배 상국이 급제한 후 학업에 정진하다(裴相國及弟後進業)
8-6(146) 후영이 재상 두로전을 거스르다(侯泳忤豆盧相)
8-7(147) 노악이 미행한 선종을 만나다(盧渥遇宣宗私行)
8-8(148) 고비웅이 다시 살아나다(顧非熊再生)
8-9(149) 장서가 애도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다(張曙起小悼)
8-10(150) 상서 장석이 꺼리는 것이 없다(張裼尙書無忌諱)
8-11(151) 형십삼낭의 의협의 일(荊十三娘義俠事)
8-12(152) 상서 이당의 죽은 딸의 혼령(李當尙書亡女魂)
권9
9-1(153) 맹홍미가 조급하고 망령되다(孟弘微躁妄)
9-2(154) 재상 양수가 양현개에게 보복하다(楊收相報楊玄价)
9-3(155) 유산보가 천왕에 대해 시를 짓다(劉山甫題天王)
9-4(156) 위 현령의 공덕의 효험(韋宰1功德驗)
9-5(157) 피를 내서 불경을 쓴 승려(刺血寫經僧)
9-6(158) 성 영공이 점치는 도구를 던진 일(成令公擲杯珓事)
9-7(159) 흰 연꽃 여자가 소창원을 미혹하다(白蓮女惑蘇昌遠)
9-8(160) 유붕거가 오현금을 타는 기녀를 유혹하다(柳鵬擧誘五絃妓)
9-9(161) 운방자의 혼령이 이인을 섬기다(雲芳子魂事李茵)
9-10(162) 추령이 요사함을 부리다(芻靈祟)
9-11(163) 고연공의 신묘한 문필(高燕公神筆)
9-12(164) 어현기(魚玄機)
9-13(165) 이씨의 딸(李氏女)
9-14(166) 풍조가 과거 급제의 명성을 흠모하다(馮藻慕名)
9-15(167) 상서 이부가 《절운》을 개정하다(李涪尙書改《切韻》)
9-16(168) 목연회와 이항이 비명횡사하다(穆·李非命)
9-17(169) 왕 급사가 강직하다(王給事剛鯁)
9-18(170) 배탄과 양수의 절조와 지향(裴·楊操尙)
9-19(171) 낳기만 하고 길러 내지 못한 노 시랑(出腹不生養盧侍郞)
9-20(172) 장흥사가 문승을 처결하다(張興師決門僧)
권10
10-1(173) 적 우승이 자색 가사 입은 승려를 비루하게 여기다(狄右丞鄙著紫僧)
10-2(174) 장고가 경솔하고 오만하다(張翱輕傲)
10-3(175) 유아초와 이은형의 우둔한 조카(劉·李愚甥)
10-4(176) 이붕이 상도무를 만나다(李鵬遇桑道茂)
10-5(177) 공 시랑이 비옷을 빌리다(孔侍郞借油衣)
10-6(178) 전현들의 해학(前賢戲調)
10-7(179) 경조부에서 까마귀가 방울을 잡아당겨 치다(京兆府鵶挽鈴)
10-8(180) 천제가 바둑 둘 상대를 부르다(天帝召棊客)
10-9(181) 양신과 조악이 생각으로 치료하다(新·趙意醫)
10-10(182) 의심병을 치료하다(療疑病)
10-11(183) 뜻밖에 화를 당하다(非意致禍)
10-12(184) 최추가 용 새끼를 먹다(崔樞食龍子)
10-13(185) 설준이 저승의 벌을 받아 죽다(薛準陰誅)
10-14(186) 최옹이 아들의 인육을 먹다(崔雍食子肉)
10-15(187) 왕적이 수레바퀴에 밟힌 일(王迪車輾事)
10-16(188) 두유휴가 푸른 연꽃을 심다(杜孺休種靑蓮花)
10-17(189) 엄 군용의 고양이와 개의 괴변(嚴軍容猫犬怪)
10-18(190) 두씨 집안의 주자지(竇家酒炙地)
10-19(191) 이창부가 비복에 대해 읊다(李昌符詠婢僕)
10-20(192) 종 대부의 지명단의 효험(鍾大夫知命丹效)
책속으로
2-4(017) 관리 임명을 잘못해 도적을 초래하다(授任致寇)
당나라의 상공(相公) 마식(馬植)은 일찍이 안남(安南 : 지금의 베트남 북부)을 진수하면서 군민(軍民)을 안무하고 만료(蠻獠 : 남서 지방의 이민족)를 회유했으며, 주지(珠池 : 진주 채취 장소)를 폐하고 검소함을 숭상했다. 이탁(李琢)이 나중에 이 지방을 진수했는데, 법 집행을 가혹하게 하고 군성(軍城)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기에 남만(南蠻)에 속하게 되어, 6∼7년간 수고롭게 병역(兵役)을 동원했다. [의종] 함통(咸通) 7년(866)에 고병(高騈)이 이곳을 수복했다. 그 전에 형주(荊州)와 서주(徐州) 사이에서 병사를 징발해 남만을 막았는데, 사람들이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어떤 거자(擧子)가 허주(許州)의 병졸 2000명이 만향(蠻鄕)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풍자했다.
“남쪽 황량한 땅에 관리를 제대로 임명하지 못해, 우리 교지(交趾 : 안남)를 전복하게 했네. 계속해서 3∼4년 동안, 우리 교지를 욕되게 했네. 나약한 자는 싸우면 퇴각하고, 무예 있는 자는 싸울수록 더욱 모욕당했네. 전사자를 실은 수레는 천하에 가득하고, 전사한 장군 중엔 존귀한 사람 많았네. 상처 난 백성까지 긁어모으고, 용사의 녹봉까지 나누었네. 씩씩한 허창(許昌 : 허주)의 군사, 충의와 용맹이 무리 가운데 으뜸이었네. 만 명의 기병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온 시내는 시체로 막혔네. 때때로 다친 병졸 돌아오면, 천 집 만 집이 통곡하네. 애통해하는 소리는 마을을 진동하고, 원망의 기운은 산골짜기를 이루네. 누가 저 북소리 들을 수 있겠는가? 몸에 박힌 쇠 살촉을 차마 보지 못하네. 이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나니, 유유히 영천(潁川)은 푸르기만 하구나.”
이 시를 음미하면 전쟁의 참상을 볼 수 있다. 관리 임명을 잘못하면 나라에 사달이 생기니, 〈대동(大東)〉의 고통이 이것과 같도다!
3-15(035) 재상 위주는 족곡옹이다(韋宙相足穀翁)
당나라 상국(相國) 위주(韋宙)는 치산(治産)에 뛰어났다. 강릉부(江陵府)의 동쪽에 그의 별장이 있었는데, 풍성히 수확하는 양전(良田)은 가장 기름진 땅으로 불렸다. 섬처럼 쌓아 놓은 벼는 모두 가을걷이하고 남은 이삭들이었다. [당나라 의종] 함통(咸通) 연간(860∼874) 초에 광주절도사(廣州節度使)에 제수되었는데, 의종(懿宗)은 번우(番禺 : 광주 지역)가 진주와 비취가 나는 곳이기 때문에 그에게 탐욕을 부리지 말라고 경계시켰다. 그러자 경조공(京兆公 : 위주)이 조용히 주대(奏對)하며 말했다.
“강릉의 장원에 쌓여 있는 곡식이 7000더미나 되니 진실로 탐할 것이 없습니다.”
의종 황제가 말했다.
“이 사람은 ‘족곡옹(足穀翁 : 곡식이 풍족한 노인)’이라 부를 만하다.”
3-21(041) 못난 자식의 세 가지 변화(不肖子三變)
당나라 [의종] 함통(咸通) 연간(860∼874)에 형주(荊州)에 “당오경(唐五經)”이라 불리는 서생이 있었는데, 학식이 정밀하고 해박해 실로 대학자라 불릴 만했으며 뜻한 바가 매우 고상했다. 사람들이 스승으로 추앙하자 문도 500명을 모아 속수(束脩 : 제자가 스승을 처음 찾아뵐 때 드리는 예물)만으로도 스스로 생활할 수 있었기에 죽을 때까지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그는 서하(西河 : 자하)와 제남(濟南 : 복생)의 기풍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형주부(荊州府)의 막료들이 대부분 그와 교유했다. 그는 늘 사람들에게 말했다.
“못난 자제에게는 세 가지 변화가 있다. 첫째는 황충(蝗蟲 : 누리)으로 변하는 것인데, 집안의 전답을 팔아 먹고사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두어(蠹魚 : 좀벌레)로 변하는 것인데, 책을 팔아 먹고사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대충(大蟲 : 호랑이)으로 변하는 것인데, 노비를 팔아 먹고사는 것을 말한다.”
이 삼식(三食)의 무리는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
6-9(105) 육 상공이 술을 권한 일(陸相公勸酒事)
재상 육의(陸扆)가 지방으로 나가 이릉(夷陵)을 다스릴 때 어떤 선비가 그를 배알했다. 육 상국(陸相國 : 육의)은 그와 함께 조용히 있다가 술을 가져오게 해서 그에게 술을 권했는데, 그 선비가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천성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육 상국이 말했다.
“정말 그대가 말한 대로라면 이미 다섯은 셈이 끝났네.”
대개 평생에 회한이 열이라고 하면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르지 않으니 자연히 절반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수재(秀才) 주건여(朱虔餘)는 수녕부(遂寧府) 사람으로 진사에 응시했는데, 그의 〈양귀비별명황부(楊貴妃別明皇賦)〉가 가장 훌륭했다. 하지만 술을 미친 듯이 마셨다. 농주방어사(隴州防禦使) 공함(鞏咸)은 촉(蜀)의 장수였는데, 주생(朱生 : 주건여)은 과거에 낙방한 동향 사람으로서 그를 배알했다. 공함도 술주정을 부렸는데 새로 검 하나를 주조하고 나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한 사내를 얻어 이것을 시험해 볼 수 있을까?”
그러자 주생이 곧바로 목을 내밀었는데, 잠시 후 몸과 목이 다른 곳에 있었다. 애석하도다! 마땅히 죽어야 할 곳이 아닌 데서 죽다니! 그러니 육 공(陸公 : 육의)의 농담은 진실로 훌륭한 말이다.
동고자(東皋子) 왕적(王勣)은 자가 무공(無功)이다. 〈두강묘비(杜康廟碑)〉와 〈취향기(醉鄕記)〉를 지어서 주덕(酒德)을 상세히 말했다.
경릉(竟陵) 사람 유허백(劉虛白)이 진사에 급제했는데, 술을 좋아해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취향엔 호부세(戶賦稅) 없음을 알고 있으니, 집이 황폐해지도록 내버려두고 단전 수련이나 해야겠네.”
세상의 술 좋아하는 자가 만약 공자(孔子)의 문도(門徒)가 된다면 훈계를 어기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