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전집 III(Oeuvres Complètes III)≫(Ed. Jean Guillaume et Claude Pichois, Gallimard, 1993)를 기준으로 해 완역한 것이다.
제라르 드 네르발은 자신이 경험한 심각한 광증을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상상력으로 간주하고 있다. 네르발은 이러한 상태를 문학적 상상의 세계라고 말한다. ≪오렐리아≫는 작가가 경험한 바로 그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꿈”을 기록한 작품이다. 거기에 온갖 기원의 신비주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고, 미신적 믿음까지도 함께하고 있다.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러한 꿈의 세계를 그려낸 네르발을 그들의 선구자로 보았다. 그들은 보편적인 삶과 무의식적 삶을 가르는 장벽을 제거하면, 인간이 소외되지도 제약받지도 않았던 시대로부터 시작된, 그러나 지금은 잃어버린 신비한 일체성에 이르게 된다고 믿었다. 이 무의식이 표면에 떠올라 현실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방법은, 꿈의 전사와 자동기술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성으로부터 해방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렐리아≫는 바로 ‘이성으로부터 해방된’ 몽상의 세계를 그려낸 작품이다.
≪오렐리아≫를 비롯해 네르발의 다른 작품들인 ≪실비≫와 ≪시바의 여왕과 정령들의 왕자 솔로몬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작가 자신이 투사된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고, 여주인공들은 모두가 ‘불의 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세 작품은 작가의 정신적 변천과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동방 여행은 시인에게는 종교적 수련일 뿐만 아니라 사랑과 죽음의 수련이었다. 그리고 이 수련은 시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계속되었으며, ≪오렐리아≫에서 그 수련의 과정이 총체적으로 끝을 맺는다. 작가가 최후에 찾고자 했던 대상은 마지막 작품인 ≪오렐리아≫에서 확연히 드러나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여인이자 어머니인 이시스 여신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오렐리아≫는 ≪불의 딸들≫과 ≪시바의 여왕과 정령들의 왕자 솔로몬 이야기≫의 완결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200자평
네르발이 경험한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꿈”의 기록. ‘이성으로부터 해방된’ 몽상의 세계를 그려낸다. 20세기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은 네르발이 도달한 결론을 들여다본다.
지은이
제라르 드 네르발의 본명은 제라르 라브뤼니다. 1808년 파리에서 태어나, 로망주의가 격동했던 프랑스에서 독특한 문제의식과 서정성 가득한 문체를 완성했다. 19세의 젊은 나이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소개하였고, 그 유려한 번역에 괴테가 깊이 감동했음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은 그는 로망주의의 총아(위고, 고티에, 보렐)들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군의관인 부친의 희망이었던 의사로서의 길을 포기하여 평생 부친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다양한 독일 문학작품 번역, 문학잡지 창간, 극작품 창작, 신문 기고 등의 다양한 문학 활동을 했다. 33세인 1841년에 첫 정신병 발작을 겪었고, 10년의 잠복기가 지난 뒤 다시 정신적 위기로 입원과 퇴원이 이어진다. 1842년에 행해진 장기간의 동방 여행과 기회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녔던 그의 편력은 ≪동방여행기≫와 여러 산문에서 주옥같은 이야기로 나타난다. 1852년 초, 두 번째 정신병 발작 이후, 필생의 작품들을 책으로 엮는 동시에 걸작들을 새롭게 발표하였고, ≪불의 딸들≫에 이르러 그의 문학 절정을 이루었다. 1855년 1월의 새벽에 비에이유-랑테른가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신비주의와 제교 통합주의(諸敎 統合主義 syncretisme)’로 일컬어지는 그의 작품 세계는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인해 한동안 편견과 망각 속에 놓여 있다가 20세기 이후 브르통, 프루스트, 아르토에 의해 새롭게 발굴되었다. 오늘날에는 루소, 스탕달, 프루스트와 함께 프랑스 최고의 산문가 중의 한 작가로 손꼽힌다. 주요 작품으로 ≪몬테네그로 사람들≫, ≪라마잔의 밤≫, ≪동방 기행≫, ≪실비≫, ≪오렐리아≫, ≪불의 딸≫, ≪보헤미아의 작은 성들≫, ≪콩트와 해학≫, ≪환상 시편≫ 등이 있다.
옮긴이
이준섭은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한 후 파리 소르본느(파리4대학)에서 프랑스 낭만주의와 제라르 드 네르발 연구로 문학석사 및 박사학위(1980년) 취득했다. 1981년부터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7년에 정년퇴임한 뒤 현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2002년에는 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프랑스 문학사(I)≫(세손출판사, 1993), ≪제라르 드 네르발의 삶과 죽음의 강박관념≫(고려대출판부, 1994), ≪프랑스 문학사(II)≫(세손출판사, 2002), ≪고대신화와 프랑스문학≫(고려대출판부, 2004) ≪프랑스문학과 신비주의 세계≫(고려대출판부, 2005) 등이 있고, 역서로는 ≪불의 딸들≫(아르테, 2007), ≪ 실비/산책과 추억≫(지만지,2008)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18세기 프랑스 신비주의와 G. de Nerval>, <테오필 고티에와 환상문학> 외 다수가 있다.
차례
제1부
제2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꿈’은 제2의 삶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우리를 가르는 상아와 뿔로 된 이 문을 통과할 때면 으스스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수면의 첫 순간은 죽음의 이미지와 같다. 흐릿한 마비 증상이 우리의 사고를 사로잡고, 그래서 우리는 ‘자아’가 또 다른 형태로 삶의 활동을 계속하는 분명한 순간을 구분할 수가 없다. 그것은 차츰차츰 밝아오는 침침한 지하세계이며, 그곳에서는 근엄한 부동의 자세로 머물고 있는 명계의 창백한 형체들이 그늘과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장면이 형체를 갖추고, 새로운 빛이 환하게 비치며 이상한 유령들이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영령들의 세계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