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원혼지(寃魂志)≫는 중국 남북조 시대 북제(北齊)와 수(隋)나라를 중심으로 활약한 문인이자 학자였던 안지추(顏之推, 531∼591 이후)가 지은 필기 소설집으로, 중국 고대 소설의 형성과 관련해 위진 남북조 불교류(佛敎類) 지괴 소설(志怪小說)의 대표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 내용은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다양한 복수 이야기로, 권선징악의 권계적(勸誡的) 메시지를 담고 있다. 원서는 3권이었으나 송나라 이후에 망실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모두 명나라 이후의 집본(輯本)이며 1권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판본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많은 고사가 당나라의 ≪변정론(辯正論)≫·≪법원주림(法苑珠林)≫과 송나라의 ≪태평광기(太平廣記)≫ 등에 인용되어 총 60여 조가 남아 있다. 이 60여 조의 고사를 통해 ≪원혼지≫ 원서의 본래 면모와 내용을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원혼지≫는 일찍이 루쉰(魯迅)이 그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1923)에서 ≪원혼지≫에 대해 “경서와 사서를 인용해 보응을 증험함으로써 유교와 불교가 혼합하는 실마리를 이미 열었다(引經史以證報應, 已開混合儒釋之端矣)”고 중요하게 평가한 후로, 리젠궈(李劍國)의 ≪당전지괴소설사(唐前志怪小說史)≫(1984)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소설사에서 북조를 대표하는 불교류 지괴 소설로서 ≪원혼지≫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원혼지≫는 기본적으로 “석씨보교지서”로 대변되는 불교류 지괴 소설에 속하지만, 부처·보살·불상·불경의 영험함이나 불법에 대한 신봉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선험기≫나 ≪명상기≫ 등과는 달리, 원혼들의 복수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수록하면서 유가 경서와 사서를 인용해 보응을 증험함으로써 유석 합일(儒釋合一)의 사상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원혼지≫가 다른 불교류 지괴 소설과 비교되는 뚜렷한 차별성이라 하겠다.
불교와 유교가 본래 하나임을 강조하면서도 현세의 삶을 중시한 안지추의 권계적인 응보관을 반영하고 있는 ≪원혼지≫는 거의 대부분의 고사에서 가해자가 당대에 응보를 받는 현세보의 서사적 특징을 띠고 있다. 이에 대해 청나라 기윤(紀昀)은 ≪사고전서총목제요≫ <자부·소설가류·환원지>에서 일찍이 “강인한 혼백이 귀신의 기운을 빌려 변고를 일으키는 것은 진실로 있을 법한 이치이니, 천당과 지옥처럼 허무맹랑해 고찰할 수 없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문장이 또한 자못 예스럽고 아정해 소설의 쓸데없이 번잡한 것과는 사뭇 다르니, 보존해 경계의 거울로 삼는다면 진실로 또한 도의에 해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해서, ≪원혼지≫의 문체가 “예스럽고 아정하며” 내용이 “경계의 거울로 삼아도 도의에 해됨이 없다”고 평가했다. ≪원혼지≫의 이러한 권계적인 특성은 송나라 이후 일련의 권선서(勸善書) 창작에 직간접적으로 계시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원혼지≫에 대한 3종의 인용서와 10종의 판본과 4종의 집록본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전체 고사를 61조로 확정하고 서로 다른 고사명을 원혼의 당사자를 기준으로 통일했으며 시대순으로 재배열했다. “출전”은 시대적으로 앞선 전적을 저본으로 했으며, “참고”는 해당 고사와 관련된 참고 자료를 명시했다. 교감문은 명백한 오류나 의미가 불분명한 경우나 문맥상 타당하지 않은 경우에 한해 원문에 번호를 달아 작성했다.
200자평
사람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인과응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다양한 복수 이야기를 소개한다. 잘 알려진 역사 인물부터 이름 없는 민초까지, 누구라도 남의 원한을 사면 반드시 그 값을 치른다. 황당하고도 흥미로운 귀신 이야기들을 통해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전한다.
지은이
≪원혼지(寃魂志)≫의 찬자 안지추(顏之推, 531∼591 이후)는 자가 개(介)이고 낭야(琅琊) 임기[臨沂, 지금의 산둥성 린이시(臨沂市)] 사람이다.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3년(531)에 태어나 수(隋)나라 개황 11년(591) 이후에 죽었다. 양나라 원제(元帝) 때 산기시랑(散騎侍郞)을 지냈고, 554년에 서위(西魏)가 양나라를 정벌해 강릉(江陵)을 함락했을 때 포로로 잡혀갔다가 556년에 북제로 망명해 봉조청(奉朝請)·중서사인(中書舍人)·황문시랑(黃門侍郎)·평원태수(平原太守) 등을 지냈으며, 577년에 북제가 멸망하자 북주(北周)로 들어가 어사상사(御史上士)를 지냈다. 수나라 때는 개황 연간에 동궁학사(東宮學士)로 초징되어 높은 예우를 받았다. 그는 여러 전적에 두루 통달하고 서간문에 뛰어났으며 독실하게 불교를 믿었다. 저작에는 지괴 소설로 ≪원혼지≫ 3권과 ≪집령기(集靈記)≫ 20권 외에 ≪안씨가훈≫ 20편, ≪안황문집(顔黃門集)≫ 30권, ≪급구장주(急救章注)≫ 1권, ≪증속음(證俗音)≫ 5권, ≪훈속문자략(訓俗文字略)≫ 1권, ≪필묵법(筆墨法)≫ 1권, ≪계성부(稽聖賦)≫ 3권이 있는데, 이 중에서 ≪안씨가훈≫만 현존하고 나머지는 모두 망실되었다. ≪북제서(北齊書)≫ 권45 <문원전(文苑傳)>과 ≪북사(北史)≫ 권83 <문원전>에 그의 전(傳)이 있다.
옮긴이
김장환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 남북조 지인 소설 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교수(2004∼2005), 같은 대학교 페어뱅크 센타(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객원교수(2011∼2012)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이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중국 문학의 벼리≫, ≪중국 문학의 향기≫, ≪중국 문학의 숨결≫, ≪중국 문언 단편 소설선≫, ≪유의경(劉義慶)과 세설신어(世說新語)≫, ≪위진 세어 집석 연구(魏晉世語輯釋硏究)≫, ≪동아시아 이야기 보고의 탄생−태평광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 연극사≫, ≪중국 유서 개설(中國類書槪說)≫, ≪중국 역대 필기(中國歷代筆記)≫, ≪세상의 참신한 이야기−세설신어≫(전 3권),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전 4권), ≪세설신어성휘운분(世說新語姓彙韻分)≫(전 3권), ≪태평광기(太平廣記)≫(전 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 8권), ≪봉신연의(封神演義)≫(전 9권), ≪당척언(唐摭言)≫(전 2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고사전(高士傳)≫, ≪어림(語林)≫, ≪곽자(郭子)≫, ≪속설(俗說)≫, ≪담수(談藪)≫, ≪소설(小說)≫, ≪계안록(啓顔錄)≫, ≪신선전(神仙傳)≫, ≪옥호빙(玉壺氷)≫, ≪열이전(列異傳)≫, ≪제해기(齊諧記)·속제해기(續齊諧記)≫, ≪선험기(宣驗記)≫, ≪술이기(述異記)≫, ≪소림(笑林)·투기(妬記)≫, ≪고금주(古今注)≫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에 관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있다.
차례
1. 두백
2. 팽생
3. 장자의
4. 공손성
5. 여의
6. 두영
7. 소아
8. 부현령 처
9. 유은
10. 왕굉
11. 송 황후
12. 우길
13. 왕릉
14. 하후현
15. 제갈각
16. 서광
17. 왕제 좌우
18. 조현량
19. 도칭
20. 간량
21. 음감
22. 만묵
23. 함현
24. 이기
25. 장조·장관
26. 국검
27. 은연
28. 부영고
29. 경광
30. 지법존
31. 공기
32. 손원필
33. 우목사 승주
34. 담마참
35. 제갈원숭
36. 장초
37. 태악기
38. 여경조
39. 유 모
40. 등완
41. 장패
42. 서철구
43. 소억
44. 원휘
45. 주정
46. 장연강
47. 악개경
48. 양도생 부곡
49. 홍씨
50. 곽조심
51. 양사달
52. 장현 부곡
53. 석승월
54. 강릉 사대부
55. 양 무제
56. 위재
57. 강계손
58. 위휘준
59. 북제 문선제
60. 진자융
61. 후주 궁녀
부록
역대 저록 및 발문
≪안씨가훈≫ <귀심편>에 수록된 원혼 고사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양(梁)나라의 강릉(江陵)이 함락되었을 때, 관내(關內) 사람 양원휘(梁元暉)가 유씨(劉氏) 성을 가진 한 사대부를 포로로 붙잡았다. 그 사람은 이전에 후경(侯景)의 난을 만나 가족을 모두 잃고 오직 겨우 몇 살 되지 않은 어린 아들 하나만 남아서 직접 등에 업고 있었는데, 눈까지 와서 진창길이 되는 바람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양원휘는 그를 감시해 거느리고 관(關)으로 들어가면서 아이를 버리라고 강요했다. 유씨는 너무 안타까워서 목숨을 걸고 간청했지만, 양원휘는 결국 강제로 아이를 빼앗아 눈밭에 던져 버리고, 몽둥이와 채찍을 번갈아 내리치면서 그를 내몰아 떠나게 했다. 유씨는 걸음마다 뒤를 돌아보며 창자가 끊어지듯이 울부짖었으며, 고통으로 몸이 피폐해진 데다가 슬픔까지 더해 며칠 만에 죽었다. 유씨가 죽은 후에 양원휘는 날마다 유씨가 나타나 손을 뻗어 아이를 찾는 것을 보았는데, 이로 인해 병을 얻었다. 양원휘가 거듭 회개하고 사죄했지만 유씨는 그치지 않고 계속 찾아왔다. 양원휘는 병든 몸으로 수레에 실려 집에 도착한 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