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난관을 헤쳐 나갈까? 작가는 작품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훠천몐(藿晨勉)을 통해서 이런 보편적인 고민을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풀어 보인다.
훠천몐의 삶은 다소 기괴하다. 통속 소설이나 드라마의 소재로나 등장할 법한 그녀의 삶을 잠시 살펴보자면, 그녀에게는 외국인의 피가 흐르는 방랑벽이 심하고 성적으로 자유로웠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집착해 살인까지 저지르고 옥중에서 자살한 어머니가 있었다. 천몐 부모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감정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러한 감정을 성적인 방식으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천몐과 그녀의 여동생 천안(晨安)은 어쩌면 남들에게는 당연한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이들 자매는 어린 나이에 경제적으로 자립심을 키워야 했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언제나 고군분투해야 했다. 게다가 평범하지 않은 부모의 영향으로 역시 사랑에 대한 시선 역시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유년시절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천몐에게 현실의 고통을 잊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그 속에 욕망을 투영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또 다른 천몐’이다. 그녀는 이 분신에 자신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모습들을 부여했다. ‘또 다른 천몐’은 따뜻한 가정에서 부모의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덕분에 슬픔이나 상처 따위는 모르며, 타고난 매력으로 여러 남성들과 다양한 연애를 하면서도 결혼이라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이렇듯 ‘또 다른 천몐’의 삶은 실제 천몐과는 대조적이라 할 만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의 인생은 온갖 풍파에 시달리던 천몐에 비해 지루할 정도로 굴곡이 없어 아버지로부터 일부러라도 고통이나 상실을 경험해 보라는 핀잔을 들을 정도였다.
이렇듯 ‘또 다른 천몐’의 등장은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에 대해 성급한 짐작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영민한 작가 쑤웨이전이 고심하여 만들어 놓은 소설 속 장치들은 매번 독자의 짐작을 조금씩 빗겨 가며 흥미와 재미를 유발한다. 나아가 ‘천몐의 분신’뿐 아니라 천몐의 주변인물도 약간씩 변형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가령 동생인 천안의 성별이 바뀐다거나, 주변인물의 이름은 그대로이지만 인적 사항이 현실과는 다르게 설정된다. 이 점이 일부 독자에게는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한 장면도 허투루 넘길 수 없게 만드는 이 소설만의 특징이기도 한 것이다.
≪침묵의 섬≫은 1994년 타이완 시보출판(時報出版)에서 초판이 발행됐다. 이번 번역에는 2001년에 발행된 2판 3쇄본을 원전 삼아 완역했다. 감각적이고 효율적인 언어를 구사한 작가의 느낌을 살려 최대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에서 번역하려 하였으나, 한국어와 중국어라는 두 언어의 태생적 차이로 부득이하게 의역을 하거나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윤문을 할 수 밖에 없던 대목도 있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타이완 작가 쑤웨이전의 장편소설이다. 1994년 제1회 시보문학백만소설상에서 심사위원추천상을 받았으며, 1999년 홍콩의 「아주주간」이 고른 ’20세기 중문 소설 100선’에 뽑혔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난관을 헤쳐 나갈까? 작가는 작품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훠천몐을 통해서 이런 보편적인 고민을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풀어 보인다.
지은이
쑤웨이전은 1954년 타이완 타이난시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광둥성 판위이다. 정치작전대학(政治作戰學校) 연극영화과를 나온 뒤, 홍콩대학에서 중문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합신문(聯合報)≫ 칼럼 ‘독서인(讀書人)’의 주편을 거쳐, 타이완 국립성공대학(國立成功大學) 중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79년 ≪연합신문≫에 첫 번째 소설 ≪그와 잠시간의 동행(陪他一段)≫을 발표해 섬세한 필치와 생기발랄한 언어 구사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 타이완의 청장년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작품 초기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을 주로 썼으나, 차츰 광범위한 제재를 망라해 현대사회의 축소판을 그려 보였다. 또한 인간 심리 묘사에도 탁월하여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쑤웨이전은 소설과 산문 부문으로 ≪연합신문≫, ≪중국시보(中國時報)≫, ≪중앙일보(中央日報)≫, ≪중화일보(中華日報)≫ 등에서 입상을 하였으며 국군문예의 황금사자상 등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희곡과 편집 부문에서도 여러 차례 수상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소설집 ≪그와 함께 한 시절(陪他一段)≫을 비롯해 ≪홍안은 이미 늙어(紅顏已老)≫, ≪열의 소멸(熱的絕滅)≫, ≪퉁팡을 떠나며(離開同方)≫, ≪옛 사랑(舊愛)≫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중국 여류 작가 장아이링(張愛玲)의 말년에 서신을 교환하며 문학에 대한 의견을 나누던 내용을 엮어 책으로 출간, 세간의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옮긴이
전남윤은 부산대학교와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중어중문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대 현대중국문화연구실 소속으로 중국 대륙에 국한된 기존의 연구를 탈피해 타이완과 홍콩은 물론,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는 화인 집단에 대한 연구와 작품 번역 등에 참여하고 있다. 학위 논문으로 <장아이링(張愛玲)의 ≪전기(傳奇)≫ 작중인물의 욕망 연구>와 <중국현대판타지문학연구(中國現當代幻想文學硏究)>가 있고, 역서로는 홍콩 여류 작가 단편소설 모음집 ≪사람을 찾습니다≫(공역)와 타이완 여류 작가 주톈신(朱天心)의 소설집 ≪고도(古都)≫가 있다.
차례
침묵의 섬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천몐(晨勉)은 언제나 ‘그녀들’의 서른 살 생일 이후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그날 타이베이를 떠나 홍콩으로 돌아왔다.
도시를 옮긴다는 것은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삶을 통틀어 가장 중대한 경험이었다. 그녀가 막 도착했던 6월 말, 공항고속도로 양옆으로 만개했을 진달래는 이미 제철이 지나 있었다.
이번 휴가 기간에 그녀는 타이베이에서만 꼬박 두 달을 머물렀다. ‘또 다른 천몐’과 둘이서 말이다. 당시 그녀는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스물다섯 되던 해 어머니는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를 키운 외할머니는 3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하나뿐인 여동생은 멀리 영국에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그녀가 다섯 살 무렵 보았던 화낼 줄 모르는 머리숱이 텁수룩하고 얼굴이 하얀 남자였다는 것이 다였다.
‘또 다른 천몐’이라는 존재는, 그녀가 대학 졸업 후 출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수감 중인 어머니를 보러 갔을 때 탄생했다. 어떤 이는 누군가를 쉽게 훔쳐보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이 또 다른 공간에 있는 상상을 한다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에게 진실하지 않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자신의 운명을 제 눈으로 보아야겠다는 생각과 뭔가 다른 인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냈다. 그녀와 상반된 경험을 가진 또 다른 훠천몐(藿晨勉)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녀는 ‘또 다른 천몐’에게 “넌 이런 삶을 원해?” 하고 물은 적이 있다. ‘또 다른 천몐’은 침묵했다. 이에 그녀는 말했다. “적어도 너에게 이런 인생을 원했는지 물어봐 준 사람 정도는 있었다는 걸 명심해.” 그녀와 ‘또 다른 천몐’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놀랍게도 조금의 장애도 없었다. 그때부터 운명은 그들 두 사람의 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