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명나라 문학자 풍몽룡(馮夢龍)이 북송 초에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고대 소설 모음집인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원전이 되는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한대(漢代)부터 북송 초에 이르는 소설 · 필기 · 야사 등의 전적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광범위하게 채록해, 총 500권에 6965조로 정리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는 것처럼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다 담고 있다. 이 때문에 《태평광기》는 이후 역사서에 인용되기도 하고 후대의 문학 작품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파생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은 몇 가지 문제를 낳았다. 분량이 너무 많다 보니 인쇄도 쉽지 않고, 교정도 쉽지 않아 판본에 많은 오류가 발생했다. 더해서 독자들이 읽기에도 부담스러웠다. 풍몽룡은 《태평광기초》의 머리말인 〈소인(小引)〉에서 “옛사람은 고사를 인용할 때 출처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출처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큰 소리로 ‘《태평광기》에 나온다’라고 말했다. 그 권질이 방대해서 사람들이 열람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풍몽룡은 당시 부실한 《태평광기》 출판 상황을 개탄하면서 이대로 방치할 경우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결국 폐기될 것을 우려해, 보다 체계적이고 엄정하게 편집한 《태평광기》 선본을 간행하고자 했다. 이에 500권 92류(類)에 총 6965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던 《태평광기》 중 번잡하고 중복 수록된 고사를 삭제하고, 배치가 잘못된 것들을 정리해 전체 80권 82부(部)에 총 2584조의 고사로 편찬했다. 《태평광기》에 분리되어 수록되었던 고사를 《태평광기초》에서 병합한 고사가 400여 조이므로 실제로는 약 3000여 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는 셈이다.
《태평광기초》의 가장 큰 특징은 비주(批注)와 평어(評語)다. 비주는 지면의 상단 여백에 기록하는 미비(眉批), 고사의 원문 사이에 기록하는 협비(夾批)와 협주(夾注)가 있는데, 《태평광기초》에 기록된 미비는 1842개이고 협비와 협주는 269개다. 평어는 고사의 중간이나 말미에 해당 고사에 대한 풍몽룡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거나 해당 고사와 관련된 다른 고사를 인용해 논평한 것으로 218개에 달한다. 미비는 특정한 대목에 풍몽룡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밖에 부류를 설명하거나 어려운 글자에 대한 독음과 뜻을 설명한 경우도 있다. 협비와 협주는 고사의 중간중간에 풍몽룡의 즉흥적인 느낌을 기록한 경우가 가장 많으며, 그 밖에 특정한 인물·명물·사건에 대해 설명한 경우도 있다. 평어는 풍몽룡의 이성적 사고, 도덕적 가치관, 역사 인식, 인정세태에 대한 감회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비주와 평어는 풍몽룡의 사상과 가치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해당 고사를 읽는 독자들의 보다 흥미로운 감상과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돕는 아주 유용한 장치라고 하겠다.
이렇듯 《태평광기초》는 문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역사, 민속학적으로도 문헌적 가치가 무척 높은 필기 문헌이나,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아직 번역 성과가 없는 형편이다. 필기 문헌 전문 연구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는 세계 최초로 《태평광기초》를 번역, 교감, 주석해 완역 출간한다. 《태평광기초》의 원전 텍스트에 대한 보다 쉽고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삼아 이후 더욱 활발한 연구 성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200자평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고대 소설집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편찬한 설화집으로, 일명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고 한다. 전 500권의 이 방대한 이야기를 명나라 풍몽룡이 중복되는 것은 삭제하고 잘못 배치된 이야기는 정리해 80권으로 엮고 자신의 비평을 첨가한 책이 《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다. 내용이 재미있을 뿐 아니라, 중국 고전 소설 비평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중국 필기문학의 전문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가 세계 최초로 번역해 소개한다. 12권에는 귀신 이야기를 다룬 권56 〈귀부(鬼部)〉부터 신령, 혼령과 무덤, 부장품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권56 〈신혼부(神魂部) 총묘부(冢墓部) 명기부(銘記部)〉까지를 수록했다.
엮은이
《태평광기초》를 평찬(評纂)한 풍몽룡(馮夢龍, 1574∼1646)은 중국 명나라 말의 문학자로, 자(字)는 유룡(猶龍)·공어(公魚)·자유(子猶)·이유(耳猶) 등이고, 호(號)는 향월거고곡산인(香月居顧曲散人)·고소사노(姑蘇詞奴)·오하사노(吳下詞奴)·전전거사(箋箋居士)·묵감재주인(墨憨齋主人)·전주주사(前周柱史)·녹천관주인(綠天官主人)·무원외사(茂苑外史)·평평각주인(平平閣主人) 등이다. 남직례(南直隸) 소주부(蘇州府) 장주현(長洲縣,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 사람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형 풍몽계(馮夢桂)와 동생 풍몽웅(馮夢熊)과 함께 “오하삼풍(吳下三馮)”으로 불렸다. 숭정(崇禎) 7년(1634)에 복건성(福建省) 수녕지현(壽寧知縣)을 지냈으며,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에 종사했다. 만년에는 반청(反淸) 운동에 가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근심과 울분 속에서 죽었다.
그는 명나라 최고의 통속 문학자로, 소설로는 가장 유명한 의화본 소설(擬話本小說)인 삼언(三言), 즉 《유세명언(喻世明言)》·《경세통언(警世通言)》·《성세항언(醒世恒言)》을 비롯해 《태평광기초》·《평요전(平妖傳)》·《열국지(列國志)》·《정사유략(情史類略)》 등을 편찬했고, 희곡으로는 《묵감재정본전기(墨憨齋定本傳奇)》, 민가집으로는 《산가(山歌)》·《괘지아(掛枝兒)》, 산곡(散曲)으로는 《태하신주(太霞新奏)》, 소화집(笑話集)으로는 《소부(笑府)》, 필기로는 《고금담개(古今譚槪)》·《지낭(智囊)》 등을 편찬했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민간 문학에 집중되어 있어서 통속 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옮긴이
김장환(金長煥)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남북조지인소설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교수(2004∼2005), 같은 대학교 페어뱅크 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객원교수(2011∼2012)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이다.
그동안 쓴 책으로 《중국 문학의 흐름》, 《중국 문학의 향기》, 《중국 문학의 향연》, 《중국 문언 단편 소설선》, 《유의경(劉義慶)과 세설신어(世說新語)》, 《위진세어 집석 연구(魏晉世語輯釋硏究)》, 《동아시아 이야기 보고의 탄생−태평광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 연극사》, 《중국 유서 개설(中國類書槪說)》, 《중국 역대 필기(中國歷代筆記)》, 《세상의 참신한 이야기−세설신어》(전 3권),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전 4권), 《세설신어 성휘운분(世說新語姓彙韻分)》(전 3권), 《태평광기(太平廣記)》(전 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 8권), 《봉신연의(封神演義)》(전 9권), 《당척언(唐摭言)》(전 2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고사전(高士傳)》, 《어림(語林)》, 《곽자(郭子)》, 《속설(俗說)》, 《담수(談藪)》, 《소설(小說)》, 《계안록(啓顔錄)》, 《신선전(神仙傳)》, 《옥호빙(玉壺氷)》, 《열이전(列異傳)》, 《제해기(齊諧記)·속제해기(續齊諧記)》, 《선험기(宣驗記)》, 《술이기(述異記)》, 《소림(笑林)·투기(妬記)》, 《고금주(古今注)》,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원혼지(寃魂志)》, 《이원(異苑)》, 《원화기(原化記)》, 《위진세어(魏晉世語)》, 《조야첨재(朝野僉載)》(전 2권),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전 2권)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 소설과 필기 문헌에 관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있다.
차례
권56 귀부(鬼部)
귀(鬼) 1
56-1(1649) 무귀론(無鬼論)
56-2(1650) 스님 지원(僧智圓)
56-3(1651) 위징(魏徵)
56-4(1652) 왕융(王戎)
56-5(1653) 방현령(房玄齡)
56-6(1654) 양부(楊溥)
56-7(1655) 유소지(庾紹之)
56-8(1656) 하후홍(夏侯弘)
56-9(1657) 왕감(王鑒)
56-10(1658) 보따리를 푼 사람(解襆人)
56-11(1659) 이영문(李令問)
56-12(1660) 부량현의 장 현령(浮梁張令)
56-13(1661) 진도(陳導)
56-14(1662) 이준(李俊)
56-15(1663) 곽승하(郭承嘏)
56-16(1664) 위황(韋璜)
56-17(1665) 동관(董觀)
56-18(1666) 왕예라는 노인(王裔老)
56-19(1667) 스님 민초(僧珉楚)
56-20(1668) 곽심(郭鄩)
56-21(1669) 주옹중(周翁仲)
56-22(1670) 노욱(盧頊)
56-23(1671) 노중해(盧仲海)
56-24(1672) 광릉의 상인(廣陵賈人)
56-25(1673) 빚을 갚은 귀신(償債鬼)
56-26(1674) 귀신 나라(鬼國)
56-27(1675) 귀신 무덤(鬼葬)
56-28(1676) 왕초(王超)
56-29(1677) 갓 죽은 귀신(新鬼)
56-30(1678) 송정백(宋定伯)
56-31(1679) 측간 귀신(廁鬼)
56-32(1680) 학질 귀신(瘧鬼)
56-33(1681) 앙살 귀신(喪煞鬼)
권57 귀부(鬼部)
귀(鬼) 2
57-1(1682) 조 공의 배(曹公船)
57-2(1683) 하후현(夏侯玄)
57-3(1684) 왕필(王弼)
57-4(1685) 소소(蘇韶)
57-5(1686) 손치(孫稚)
57-6(1687) 육교(陸喬)
57-7(1688) 상이(常夷)
57-8(1689) 사문 영 선사(沙門英禪師)
57-9(1690) 사만세(史萬歲)
57-10(1691) 왕명(王明)
57-11(1692) 조합(趙合)
57-12(1693) 이상(李湘)
57-13(1694) 위포(韋浦)
57-14(1695) 우문적(宇文覿)
57-15(1696) 고총(顧總)
57-16(1697) 이패(李霸)
57-17(1698) 위제휴(韋齊休)
57-18(1699) 허생(許生)
57-19(1700) 위생과 포생(韋鮑·二生)
57-20(1701) 육빙(陸憑)
57-21(1702) 파협 사람(巴峽人)
57-22(1703) 정교(鄭郊)
57-23(1704) 왕소(王紹)
권58 귀부(鬼部)
귀(鬼) 3
58-1(1705) 이원평(李元平)
58-2(1706) 호복지(胡馥之)
58-3(1707) 환도민(桓道愍)
58-4(1708) 당훤(唐晅)
58-5(1709) 허지옹(許至雍)
58-6(1710) 위씨의 아들(韋氏子)
58-7(1711) 장홍양(張弘讓)
58-8(1712) 소태현(蘇太玄)
58-9(1713) 유주의 아장(幽州衙將)
58-10(1714) 장우(張禹)
58-11(1715) 주칠낭(朱七娘)
58-12(1716) 당검(唐儉)
58-13(1717) 신번현령(新繁縣令)
58-14(1718) 여강의 풍씨 할멈(廬江馮媼)
58-15(1719) 추남(鄒覽)
58-16(1720) 유즐의 누이동생(劉騭妹)
58-17(1721) 박 태후 묘(薄太后廟)
58-18(1722) 이장무(李章武)
58-19(1723) 유 참군(柳參軍)
58-20(1724) 여항광(餘杭廣)
58-21(1725) 염경(閻庚)
58-22(1726) 왕지도(王志都)
58-23(1727) 장수일(張守一)
58-24(1728) 모영(牟穎)
58-25(1729) 이적(李赤)
58-26(1730) 이함(李咸)
58-27(1731) 사고(謝翱)
권59 귀부(鬼部)
귀(鬼) 4
59-1(1732) 한중(韓重)
59-2(1733) 독고목(獨孤穆)
59-3(1734) 노충(盧充)
59-4(1735) 담생(談生)
59-5(1736) 장자장(張子長)
59-6(1737) 최함(崔咸)
59-7(1738) 곽저(郭翥)
59-8(1739) 이칙(李則)
59-9(1740) 하북의 촌장(河北村正)
59-10(1741) 임회인(任懷仁)
59-11(1742) 호연기(呼延冀)
59-12(1743) 소우(蕭遇)
59-13(1744) 곽지운(郭知運)
59-14(1745) 양원영(楊元英)
59-15(1746) 계유의 조카딸(季攸甥)
59-16(1747) 위율(韋栗)
59-17(1748) 유조(劉照)
59-18(1749) 왕유(王鮪)
59-19(1750) 장종(張宗)
59-20(1751) 조숙아(趙叔牙)
59-21(1752) 장유(張庾)
59-22(1753) 유풍(劉諷)
59-23(1754) 심공례(沈恭禮)
59-24(1755) 예언사(倪彦思)
59-25(1756) 호희(胡熙)
59-26(1757) 유삼(劉三)
59-27(1758) 회서의 군장(淮西軍將)
59-28(1759) 고생(高生)
59-29(1760) 유타(劉他)
권60 신혼부(神魂部) 총묘부(冢墓部) 명기부(銘記部)
신혼(神魂)
60-1(1761) 방아(龐阿)
60-2(1762) 왕주(王宙)
60-3(1763) 정생(鄭生)
60-4(1764) 소내(蘇萊)
60-5(1765) 정씨의 딸(鄭氏女)
60-6(1766) 배공(裴珙)
60-7(1767) 설위(薛偉)
총묘(冢墓)
60-8(1768) 육동미(陸東美)
60-9(1769) 반장(潘章)
60-10(1770) 정영흥(丁永興)
60-11(1771) 왕번(王樊)
60-12(1772) 노관의 무덤(奴官冢)
60-13(1773) 엄안지(嚴安之)
60-14(1774) 이막(李邈)
60-15(1775) 번택(樊澤)
명기(銘記)
60-16(1776) 이사(李斯)
60-17(1777) 하후영(夏侯嬰)
60-18(1778) 장은(張恩)
60-19(1779) 왕과와 웅박(王果·雄博)
60-20(1780) 위대경(衛大經)
60-21(1781) 정흠열(鄭欽悅)
60-22(1782) 한유(韓愈)
60-23(1783) 배도(裴度)
60-24(1784) 장유청(張惟淸)
60-25(1785) 유광(柳光)
책속으로
56-30(1678) 송정백(宋定伯)
남양(南陽) 사람 송정백이 젊었을 때 밤길을 가다가 귀신을 만났다. 송정백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귀신이 말했다.
“나는 귀신이오.”
귀신이 물었다.
“그대는 또 뉘시오?”
송정백이 귀신을 속여 말했다.
“나도 귀신이오.”
귀신이 물었다.
“어디로 가려 하시오?”
송정백이 대답했다.
“완시(宛市)로 가려 하오.”
귀신이 말했다.
“나도 완시로 가려 하오.”
그리하여 함께 몇 리를 가다가 귀신이 말했다.
“걸음걸이가 너무 느리니 서로 번갈아 업어 주기로 하면 어떻겠소?”
송정백이 말했다.
“그거 좋소!”
귀신이 먼저 송정백을 업고 몇 리를 갔는데 귀신이 말했다.
“그대는 너무 무거우니 귀신이 아닌 것 같소.”
송정백이 말했다.
“나는 신참 귀신이기 때문에 몸이 무거울 뿐이오.”
이번에는 송정백이 귀신을 업었는데 귀신은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두세 차례 번갈아 업어 주었다. 송정백이 다시 말했다.
“나는 신참 귀신인지라 귀신이 꺼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오.”
귀신이 대답했다.
“오직 사람의 침을 좋아하지 않소.” 미 : 지금 습속에 꺼리는 것을 보면 바로 침을 뱉는 데에는 그 유래가 있다.
그리하여 함께 가다가 도중에 물을 만났는데, 송정백은 귀신에게 건너가라고 한 뒤 들어 보았더니 물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송정백이 스스로 물을 건너갔는데 귀신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소리가 나는 것이오?”
송정백이 말했다.
“갓 죽어서 물을 건너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소.”
장차 완시에 도착할 즈음에 송정백은 곧바로 귀신을 들어 올려 어깨 위에 놓고 꽉 붙잡았다. 귀신이 크게 소리치며 꽥꽥 소리를 내면서 내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송정백은 들어주지 않았다. 송정백이 곧장 완시로 가서 귀신을 땅에 내려놓았더니 한 마리 양으로 변하자, 바로 그것을 팔았으며 또 그것이 변신할까 걱정해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돈 1500냥을 받고 떠났다. 미 : 송정백은 속임수가 심했지만 또한 다행히도 어리석은 귀신을 만났다.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다.
“정백이 귀신을 팔아 1500냥을 벌었다네.”
59-4(1735) 담생(談生)
담생은 마흔 살이 되도록 부인이 없었는데, 늘 책을 읽으며 감격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밤중에 나이가 열대여섯 살쯤 되고 용모와 차림새가 천하에 둘도 없는 여자가 담생을 찾아와 부부가 되겠다고 하면서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니 불로 나를 비춰 보지 마세요. 3년 후에는 비춰 보아도 됩니다.”
이들은 부부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이미 두 살이 되었을 때 담생은 참을 수 없어서 밤에 부인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불로 비추어 보았더니, 부인의 허리 위로는 사람처럼 살이 돋아나 있었으나 허리 아래로는 단지 마른 뼈만 있을 뿐이었다. 부인이 이를 알아차리고서 말했다.
“당신은 나를 저버렸군요. 나는 거의 살아나려고 했는데, 어찌하여 1년을 더 참지 못하고 결국 비춰 보았습니까?”
담생이 사과했지만 부인은 울면서 눈물을 멈추지 못하며 말했다.
“당신과 부부의 인연은 비록 영원히 끝났지만 내 아들이 염려됩니다. 만약 당신이 가난하면 혼자 힘으로 아들과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니, 잠시 나를 따라오면 당신에게 물건을 하나 주겠습니다.”
담생은 부인을 따라가서 화려한 집으로 들어갔는데, 집이며 기물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부인은 진주로 된 장삼 한 벌을 담생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이면 먹고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담생의 옷자락을 찢어서 잘 보관한 다음 담생을 떠나보냈다. 그 후에 담생은 장삼을 가지고 시장으로 갔는데, 휴양왕(睢陽王)의 집에서 그것을 사서 담생은 천만 전을 벌었다. 휴양왕이 그 옷을 알아보고 말했다.
“이것은 내 딸의 장삼이니 틀림없이 무덤을 도굴했을 것이다.”
휴양왕은 곧 담생을 잡아 와 심문했다. 미 : 〈모란정도타장원극(牡丹亭刀打狀元劇)〉은 이 고사를 바탕으로 했다. 담생은 사실대로 자세히 아뢰었으나 휴양왕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딸의 무덤을 살펴보았는데 무덤은 예전처럼 완전한 상태였다. 딸의 무덤을 파고 보았더니 과연 관 뚜껑 밑에서 담생의 옷자락이 나왔다. 휴양왕이 담생의 아들을 불러와 보았더니 딸을 빼닮았기에 휴양왕은 그제야 담생의 말을 믿게 되었다. 휴양왕은 즉시 담생을 예우하고 주서(主婿)로 삼았으며, 표문을 올려 그 아들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60-14(1774) 이막(李邈)
유안(劉晏) 휘하의 판관(判官) 이막은 장원이 고릉현(高陵縣)에 있었는데, 장원의 전객(佃客 : 소작농)이 스스로 말했다.
“저희들은 오랫동안 도적질을 했는데, 근자에 한 옛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원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아주 크고 높다란 무덤이 있는데, 소나무 숲 사이로 200보를 들어갔더니 무덤이 나왔습니다. 무덤가에 부러져 풀 속에 넘어진 비석이 있었는데, 글자가 닳아 없어져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 그 옆으로 수십 장(丈)을 파 들어가자 돌문이 하나 나왔는데, 쇳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똥물을 끼얹어 부식시키자 문이 겨우 열렸습니다. 문이 열리자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몇 사람이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나가려고 했지만, 제가 살펴보니 다른 것은 없었기에 틀림없이 장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안으로 돌을 던져 보게 했는데, 돌을 던질 때마다 화살이 번번이 날아왔습니다. 10여 개의 돌을 던지자 화살이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횃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중문(重門)을 열자 나무 인형 수십 개가 눈을 뜨고 검을 휘둘러 다시 몇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무 인형을 때리자 그들의 병기가 모두 땅에 떨어졌습니다. 사방의 벽에 각각 호위병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남쪽 벽에는 옻칠한 커다란 관이 쇠줄에 매달려 있었으며, 그 아래로 금옥과 구슬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미처 훔치기도 전에 관의 양쪽 모서리에서 갑자기 쏴아! 하고 바람이 일더니 모래가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순식간에 바람이 심하게 불자 모래가 마치 물처럼 흘러나오더니 넓적다리까지 잠겼습니다.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달아나 문을 나가려 했는데 문은 이미 닫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또 모래에 파묻혀 죽자, 저희들은 함께 땅에 술을 뿌리고 사죄하면서 다시는 무덤을 도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평 : 《수경(水經)》에서 이르길,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낭야(琅琊)에 도읍을 정할 때 윤상(允常 : 구천의 부친)의 무덤을 옮기려 했는데, 무덤 안에서 바람이 일더니 모래가 날아와 사람을 덮치는 바람에 접근할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한구의(漢舊儀)》에 따르면,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능을 조성할 때 능 안을 사방 1장 크기로 만들고 그 바깥에 쇠뇌와 불화살과 모래를 보이지 않게 설치해 두었다고 한다. 아마도 옛날에 무덤을 만들 때는 무덤 안에 이와 같은 장치가 있었던 것 같다. 미 : 지금 이런 장치법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