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페브르는 라블레가 무신론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라블레를 무신론자라고 비난하던 동시대인들의 글과 라블레의 글을 살펴본 다음 라블레를 무신론자라고 비난하던 당시의 그 말이 오늘날 사용하는 무신론자라는 말의 의미와 다르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라블레는 무신론자가 아님을 증명한다.
페브르는 라블레를 당시의 인문주의자(특히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가(특히 루터)와 비교해 그가 인문주의에 경도되어 있음을 밝혀낸다. 나아가 라블레의 ‘시대’는 무신앙을 가능하게 해 주었는지, 16세기의 철학이나 과학은 라블레가 무신론을 전개할 수 있는 “심성적 도구”를 제공해 주었는지를 검토한다. 이것은 독창적이고 야심적인 문제 제기였다. 페브르에 따르면, 16세기는 그러한 도구를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끔 무신앙적인 견해를 표명할 수는 있었지만 체계화할 수는 없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가장 뛰어난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라블레도 마찬가지였다. 페브르는 16세기의 삶, 철학, 언어, 과학, 나아가 음악, 감각, 마녀, 비학(秘學) 등 시대의 심성적 한계를 검토한 후, 16세기는 “믿기를 원하던 시대”라는 결론을 내린다. 라블레는 무신론자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라블레는 무신론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가 될 수도 없었다는 대답을 한 것이다.
무신론 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책은 페브르가 제시한 ‘심성사’의 정수를 보여 준다. 페브르는 16세기인들은 심성적 도구의 결여로 무신앙을 체계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될 수 없었다고 증명하는 것이니, 달리 말하면 그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개인의 창의력과 구조의 관계다. 페브르를 계승해 아날학파를 이끈 페르낭 브로델이 고심했던 문제 역시 개인과 구조였으며, 페브르를 이끈 철학자 앙리 베르가 ≪16세기의 무신앙 문제≫에 대한 서평에서 지적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구조주의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페브르의 이 책에서 구조주의를 발견했음을 언급하는 것도 이 책의 사학사적 위치, 나아가 당시의 인문학적인 지형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은 그 자체로 시대의 심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페브르는 이 책에서 심성사의 전형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의 감수성>, <마술, 어리석음인가 심성적 혁명인가>, <대략에서 정확까지>, <느낌의 역사, 대공포>, <역사에서의 죽음> 등과 같은 논문을 발표하며 심성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아날학파 내에서는 조르주 뒤비, 필립 아리에스, 미셸 보벨 같은 역사가들이 페브르의 뒤를 이어 심성사 연구를 심화시켰다.
200자평
프랑수아 라블레가 무신론자인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뤼시앵 페브르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그것은 역사학의 시작이요 끝이다. 문제가 없으면 역사가 없다”며 ‘문제사’를 제창했다. 문제를 제기하고 증명해 나가는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해 신생 사회과학과 대등한 ‘과학’의 대열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역사 방법론적으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지은이
뤼시앵 페브르는 프랑스 동부의 낭시에서 태어나 프랑슈콩테 지방의 주도인 브장송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99년 파리의 고등사범(E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수학했으며, 1911년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 1567년의 위기. 기원과 결과. 정치·종교·사회적 연구>로 소르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여기에서 평생의 학문적 동지인 마르크 블로크(1886∼1944)를 만났으며, 함께 <경제사회사 아날(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을 창간했다. 1933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프랑스 백과사전≫의 편집자가 되어 철학자 앙리 베르와 함께 꿈꾸었던 학문적 ‘종합’을 실천했다.
주요 저서로는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1911), ≪땅과 인간의 진보≫(1922), ≪하나의 운명, 마르틴 루터≫(1928), ≪16세기의 무신앙 문제≫(1942), ≪오리게네스와 데 페리에 혹은 ‘세상의 해조(諧調)’의 수수께끼≫(1942),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1944)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한 것들을 묶은 ≪미슐레와 르네상스≫, ≪명예와 조국≫, ≪유럽. 문명의 발생≫ 등이 출판되었다. 페브르는 자신의 잡지인 <아날>에 무려 2천여 편의 글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고 독려했는데, 그의 주요 논문들은 ≪역사를 위한 전투≫(1953), ≪16세기의 종교적 심장에서≫(1957), ≪완전한 역사를 위하여≫(1962), ≪르네상스 프랑스에서의 삶≫(1977) 등에 수록되어 있다.
페브르는 16세기 전공자로서도 국제적으로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대역사가이지만, 그의 명성은 현대 역사학의 흐름을 선도한 ‘아날학파’의 창시자로서 더욱 높다. 아날학파는 구조주의 역사학을 ‘새로운 역사학’으로 제시했는데, 물질적인 구조주의 역사학이 페르낭 브로델의 역사학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면, 정신적인 구조주의 역사학은 페브르의 역사학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의 무신앙 문제≫에서, 프랑수아 라블레 같은 뛰어난 인물도 자기 시대의 정신적 한계(“믿기를 원하던 시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주장은 바로 그 같은 구조주의를 담고 있는 것이다.
옮긴이
김응종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했으며(1978), 프랑스 프랑슈콩테 대학교에서 뤼시앵 페브르의 역사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1987). 1988년부터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날학파≫(1991), ≪오늘의 역사학≫(공저, 1998), ≪아날학파의 역사세계≫(2001),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2005), ≪페르낭 브로델≫(2006)을 썼으며, 프랑수아 퓌레와 드니 리셰의 ≪프랑스 혁명사≫(1990), 뤼시앵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 라블레의 종교≫(1996), 퓌스텔 드 쿨랑주의 ≪고대도시≫(2000)를 번역했다. 초기에는 ‘아날학파’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켜 사학사적인 연구에 집중했으나, 최근에는 17세기의 회의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뤼시앵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를 계승한 ‘17세기의 무신앙 문제’라는 주제로 연구서를 쓸 계획이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머리말
서론
제1장 삶을 장악한 종교
1. 개인적인 삶
2. 전문적인 삶
3. 공적인 삶
4. 선구자의 문제
제2장 무종교의 받침대: 철학?
1. 심성적 도구
A. 없는 단어들
B. 구문과 원근
C. 라틴어의 항변
D. 하나의 예: 무한
2. 두 개의 사상
A. 그리스 사상과 기독교 신앙. 충돌?
B.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교류
제3장 무종교의 받침대: 과학?
1. 르네상스의 옛 신화
2. 인쇄술과 그 결과: 소문
3. 도구와 과학적 언어의 결핍
4. 유동적인 시간과 고정된 시간
5. 가정과 실제: 세계의 체계
6. 코페르니쿠스의 관점
7. 세계의 체계, 확신? 두려움?
8. 16세기에서의 의심
9. 16세기에서의 진실
10. 수공업적인 심성
제4장 무종교의 받침대: 비학(秘學)
1. 선구자들의 세기
2. 냄새·맛·소리
3. 음악
4. 시각의 지체
5. 불가능에 대한 감각
6.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7. 악마가 사는 우주
8. 비학과 종교
결론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오늘날에는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한다. 16세기에는 선택이 없었다.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유랑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오직 생각 속에서였다. 그것은 현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상력의 게임이었다. 실천을 빠뜨릴 수 없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간에,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의 욕조에 몸을 담그는데, 죽음으로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죽음 역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종교의식에 의해서 기독교적이기 때문이다.
-37쪽
근대 세계를 만든 대다수 사람들의 깊은 종교심. 나는 데카르트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러한 표현이 한 세기 전의 라블레에게도, 그리고 그가 “깊은 신앙심”을 멋지게 표현해 준 사람들에게도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1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