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타이완 여성 작가 주톈신(朱天心)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도(古都)≫는 이 책의 제목이 된 중편소설 <고도>(1996)를 비롯하여, <베니스의 죽음(威尼斯之死)>(1992), <라만차의 기사(拉曼査志士)>(1994), <티파니에서 아침을(第凡內早餐)>(1995), <헝가리의 물(匈牙利之水)>(1995)까지 총 다섯 편의 중·단편 작품이 실려 있다.
독자는 처음부터 눈에 익은 듯한 제목에 어쩌면 친숙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짐작하다시피 ≪고도≫에 수록된 작품들은 제목을 대부분 원작이 있는 영화나 소설에서 차용해 왔다. <고도>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동명 소설 ≪고도≫를, <라만차의 기사>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베니스의 죽음>은 토마스 만의 소설이자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각각 그 이름을 따왔다. 단, <헝가리의 물>은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헝가리안 워터’라고 불리는 근대 최초의 향수에서 그 제목을 따왔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농담처럼 작중 화자의 입을 빌려 “가끔 나는 글을 끝내고도 제목을 짓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심지어 프로답지 못하게 두어 번쯤 문예부 편집장에게 제목을 대신 지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라고 하는데, 실제로 어떤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길 따름이다. 이처럼 친숙하게 서문을 열지만, 소설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작가는 다시, “이봐, 긴장하지 마….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토마스 만도 나오지 않을 거고, 비스콘티도 없어. 심지어 진짜 베니스와도 상관이 없어”(<베니스의 죽음>)라는 도발적인 어투로 독자를 당황시킨다. 동시에 이런 발칙함이 독자로 하여금 주톈신이라는 작가는 물론이고 ≪고도≫라는 소설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고도≫ 속에서 주톈신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자신만의 감성과 개성 있는 필치로 간간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깊은 공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주톈신의 글쓰기는 분명 낯설다. 기승전결의 뚜렷한 전개도 없고,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소설 속 주인공의 이미지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없음은 물론이고, 주인공의 이름조차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 심지어 <고도>에서 작중 화자가 회상하는 추억조차도 ‘나’의 추억이 아닌 ‘너’의 추억이다. 독자는 작중인물과 묘한 거리 두기를 유지하면서, <고도>에 나오는 여행안내 책자처럼 작가가 영리하게 배치해 놓은 동선을 따라가야 비로소 전체의 그림을 볼 수 있게 된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타이완의 중견 여류 작가인 주톈신의 소설집을 국내 최초로 출간했다. 이 책은 1997년 「중국시보(中國時報, Chinese Times)」에서 10대 소설에 선정되었으며, 「연합신문(聯合報)」에서 최우수 도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홍콩 시사 주간지 「아주주간(亞洲周刊)」에서 선정한 20세기 중국 100대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은이
주톈신은 1958년 3월 12일 타이완 펑산(鳳山)에서 태어났으며, 타이완대학 역사학과 출신의 재원이다. 아버지 주시닝(朱西寧)은 작가로 이름을 떨쳤고, 어머니 류모샤(劉慕沙)는 번역가이며, 언니 주톈원(朱天文) 역시 작가이자 허우샤오셴(侯孝賢) 영화의 각본가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다. 특히 언니 주톈원은 우리나라에서 ≪이반의 초상(慌人手記)≫이라는 작품으로 먼저 소개되었으며, 추 티엔 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주톈신은 양친의 영향을 받아 십 대부터 창작을 시작했으며, 15세에 최초의 작품 <량샤오치의 하루(梁小琪的一天)>가 ≪중화일보부간(中華日報副刊)≫에 게재되면서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일찍이 ≪산산서간(三三書刊)≫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작가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주톈신의 초기 작품은 청춘 소설이 주를 이루었으나, ≪내가 기억하기에…(我記得…)≫(1987) 이후 전후의 타이완 사회를 묘사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관·시간관을 고수하는 개성적인 소설을 차례로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그녀는 중국 본토 출신(외성인)이던 아버지와 타이완 출신(본성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위 ‘외성인 2세대’ 여성 작가로, 기억과 역사, 그리고 자신과 같은 집단의 심경을 대변하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묻는 작품들을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다. 주톈신의 작품들 가운데,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고도(古都)≫는 1997년 ≪중국시보(中國時報, Chinese Times)≫에서 10대 소설에 선정되었으며, ≪연합신문(聯合報)≫에서 최우수 도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홍콩 시사 주간지 ≪아주주간(亞洲周刊)≫에서 선정한 20세기 중국 100대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사냥꾼들(獵人們)≫, ≪방주에서의 나날들(方舟上的日子)≫, ≪태평세월의 노래(擊壤歌)≫, ≪어제 내가 젊었을 때(昨日當我年經時)≫, ≪고향의 형제들을 그리며(想我眷村的兄弟們)≫, ≪방랑자(漫遊者)≫, ≪스물두 살이 되기 전에(二十二歲之前)≫, ≪초여름 연꽃 필 무렵의 사랑(初夏荷花時期的愛情)≫등 다수가 있다. 그 가운데 중·단편소설집 ≪고도(古都)≫는 출판 당시 문단과 학계에서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2000년 일본의 겐이치로 시미즈(淸水賢一郞)와 2007년 미국의 하워드 골드블랫(Howard Goldblatt)에 의해 각각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소개되기도 했다. 타이완에서는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꼽히며 독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옮긴이
전남윤은 부산대학교와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중어중문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대 현대중국문화연구실 소속으로 중국 대륙에 국한된 기존의 연구를 탈피해 타이완과 홍콩은 물론,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는 화인 집단에 대한 연구와 작품 번역 등에 참여하고 있다. 학위 논문으로 <장아이링(張愛玲)의 ≪전기(傳奇)≫ 작중인물의 욕망 연구>와 <중국현대판타지문학연구(中國現當代幻想文學硏究)>가 있고, 역서로는 홍콩 여류 작가 단편소설 모음집 ≪사람을 찾습니다≫(공역)와 타이완 여류 작가 주톈신(朱天心)의 소설집 ≪고도(古都)≫가 있다.
차례
베니스의 죽음
라만차의 기사
티파니에서 아침을
헝가리의 물
고도
해설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언젠가는 이 골목과 거리에, 타이완을 사랑한다는 새 정부에 의해 효율적으로 재산권을 회수당하고, 그 대신 부실 공사로 지어진 우정국 숙소와 세관 숙소, ××대학 교수 숙소, 수장(首長) 관사 등이 생겨날 것이다. 바로 52번지 일대를 제외한 원저우 거리 전체가 그렇게 된 것처럼. 그때가 되면 너에게는 더 이상 갈 만한 길도, 의지할 만한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어찌 다시 가지 못할 뿐이겠는가? 너는 너와 처지가 비슷한 어느 소설가가 쓴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원래 가족이 묻히지 않은 곳은, 고향이라 부를 수 없다.” 너는 그 소설가처럼 가혹한 요구를 하려는 건 아니고, 다만 겸허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이름이야 어떻게 짓건 간에(보통은 번영이나 진보가 들어가고, 가끔은 희망이나 행복 같은 것이 들어가기도 했다)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있는 장소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낯선 도시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 낯선 도시를 구태여 특별히 사람들에게 귀히 여기고, 아끼고, 보호하고, 인정하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