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벵베니스트의 언어에 대한 근본 태도는 매우 다양하고 독창적이다. 복잡한 언어 현상을 하나의 테두리 내에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을 포괄할 수 있는 총괄적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의 언어관은 어느 특정한 관점에서 설정된 것도 아니며, 어느 특정 학파에도 귀속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언어 연구에 관점이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참된 모습을 밝히기 위해서는, 다면적인 복합체를 형성하는 언어 현상을 각각 일정한 관점을 가진 다양한 시각에서 해명해야 된다는 것이다. 획일적 환원주의에 입각해서 언어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언어의 성격 자체를 인정하면서 이를 해명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한다. 그리하여 연구 대상의 실체란 이를 정의하는 방법과 분리될 수 없으며, 언어의 이러한 복잡성에 직면해서 이 언어 현상을 합리적 원칙과 분석 방법에 따라 분류하고, 동일한 개념들과 기준에 의해 일관되고 엄밀하게 언어를 기술할 수 있도록 이 현상들에 질서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벵베니스트는 언어가 사회적 사실이며, 동시에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기호로서 언어 구조에 갇힌 인간언어의 본질을, 상징 체계로서 유의미 기호를 사용하는 인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구조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체계로서 정태적 언어 기호론을 활동으로서 동태적 언어 기호론으로 변용함으로써, 그는 18∼19세기 가장 위대한 언어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훔볼트(W. Humboldt)가 말한 것처럼 언어는 에르곤(ergon), 즉 만들어진 산물로서 언어가 아니라 에네르게이아(energeia), 즉 창조적 활동으로서 언어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오늘날 언어학은 촘스키(N. Chomsky)의 생물학적 보편주의와 인지주의가 한편을 차지하면서 유전자생물학, 신경과학, 뇌과학, 심리학, 인지과학 등과 손을 잡고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형론과 사회언어학적 탐구로 지평을 점차 넓혀 가면서 언어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탐구하고 있다. 언어의 형식 구조 분석의 틀을 뛰어넘어 언어가 갖는 유의미한 다양한 역동성을 정신과 사회 내에서 추구하려는 이러한 경향을, 우리는 벵베니스트의 여러 연구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현대 언어학의 흐름을 선구적으로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200자평
벵베니스트는 인도유럽어 비교문법의 역사에서 소쉬르-메이예 노선을 계승하는 가장 훌륭하고 탁월한 학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인도유럽어학과 비교문법을 통해서 소쉬르처럼 잠재된 언어의 공시 구조와 체계를 발견하고 이로써 일반화가 가능한 원리를 찾아, 공시와 통시의 정당성이 어디에서 도출되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그가 가장 아끼는 주옥같은 논문들을 모은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지은이
에밀 벵베니스트는 인도유럽어 비교언어학자이자 일반언어 이론가이며, 언어인류학자이자 신화종교학자로 생애의 50년간을 언어 연구에 헌신했다. 그 결과 18권의 방대한 저서와 291편의 다양한 논문, 300편 이상의 서평을 우리에게 남겼다.
비교언어학자로서 그는 스승 메이예가 바라던 바대로 이란어 연구에 몰입함으로써 언어학에 발을 들여놓는다. 고대 이란어, 고대 페르시아어, 오세티아어, 소그디아나어, 아베스타어, 아르메니아어 등의 인도이란어의 여러 언어를 연구했고, 여기에서 출발해 본격적으로 인도유럽어 비교문법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학위 논문 ≪인도유럽어 명사 형성법의 기원(Origines de la Formation des Noms indo-européens)≫(1935)을 저술함으로써 기존의 인도유럽어에 대한 연구 관점과 사고방식에서 일대 전환점(“epoch-making”)을 맞게 된다. 이어서 1948년에 발표한 ≪인도유럽어의 행위자 명사와 행위 명사(Noms d’Agent et Noms d’Action en Indo-européen)≫는 “20세기 인도유럽어 비교문법에서 가장 훌륭한 저술”이 된다.
인도유럽어 비교문법의 연구가 진척되고 다양한 언어사실을 접촉하면서 그의 관심은 일반언어이론으로 기울어진다. 특히 그는 유형론적 관심에서 미국 인디언어(langues indiennes)를 연구한다. 이와 더불어 언어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특히 그는 한편으로 언어는 기호라는 소쉬르의 원리에 강한 영향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 메이예의 영향으로 언어가 사회적 사실이라는 점에 착안해, 언어 기호의 상징성과 문화, 사회의 의미론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언어 연구를 시도한다.
인류학과 사회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가 인류학자인 모스(M. Mauss)와 더불어 <사회학회 연보(L’année sociologique)>를 창간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하여 벵베니스트는 벅(G. C. Buck)이 말한 바대로 인도유럽어 비교문법의 역사에서 소쉬르-메이예 노선을 계승하는 가장 훌륭하고 탁월한 학자가 된다.
옮긴이
김현권은 197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파리7대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2002년에는 파리13대학 전산언어학연구소에서 연구했다.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불어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역서로는 벵베니스트의 ≪일반언어학의 제문제≫(1988),≪인도유럽사회의 문화제도 어휘연구 1, 2≫(1999), ≪일반언어학의 여러 문제 1≫(2012), ≪일반언어학의 여러 문제 2≫(2013), 메이예의 ≪역사언어학과 일반언어학≫(1997), 바르트부르크의 ≪언어학의 문제와 방법≫(1993), ≪프랑스어 발달사≫(2000),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노트≫(2007), ≪일반언어학 강의≫(2008), 편역서로는 ≪소쉬르의 현대적 이해를 위하여≫(1998), ≪페르디낭 드 소쉬르 비판과 수용: 언어학사적 관점≫(2002)이 있다. 논문으로는 <프랑스 사전 전통과 TLF>(2008), <설명결합사전(DEC)와 ‘시작하다’의 의미기술>(2009), <눈뫼 선생 학문과 일반언어학이론>(2005), <김방한의 소쉬르연구>(2012), <언어학 방법론의 발산(divergence)과 수렴(convergence), 프랑스 19세기와 20세기 언어학의 지적 전통과 혁신>(2012) 등 다수가 있다.
차례
제1부 언어학의 변모
제1장 일반언어학의 최근 경향
제2장 언어학의 발전을 살펴봄
제3장 소쉬르 사후 반세기
제2부 의사소통
제4장 언어 기호의 성질
제5장 동물의 의사소통과 인간언어
제6장 사고 범주와 언어 범주
제7장 프로이트가 밝힌 언어 기능에 대한 고찰
제3부 구조와 분석
제8장 언어학의 ‘구조’
제9장 언어의 분류
제10장 언어 분석의 층위
제11장 라틴어 전치사의 잠재논리 체계
제12장 격 기능의 분석: 라틴어 속격
제4부 통사 기능
제13장 명사문
제14장 동사의 능동태와 중동태
제15장 타동 완료의 수동태 구문
제16장 언어적 기능에서 본 être와 avoir
제17장 일반 통사론의 문제
제5부 언어 속의 인간
제18장 동사 인칭 관계의 구조
제19장 프랑스어 동사의 시제 관계
제20장 대명사의 성질
제21장 언어에 나타난 주관성
제22장 분석철학과 언어
제23장 성구 파생동사
제6부 어휘와 문화
제24장 재구의 의미론적 문제
제25장 고대와 현대의 완곡 표현
제26장 인도유럽어 어휘의 선물과 교환
제27장 언어 표현에 나타난 ‘리듬’의 개념
제28장 civilisation, 단어 역사의 연구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언어학의 방법론 문제에 관한 논의는 결국 모든 인문과학을 새로이 총괄할 서곡에 불과하리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비전문적 용어로 오늘날 일반언어학 연구의 핵심 문제, 언어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대상에 대해 가진 개념 및 그들의 연구 방식이 지니는 의미를 특히 강조할 것이다.
-5쪽
그러므로 언어에만 고유하게 내재하는 우연성의 역할은 현실의 음성적 상징 기호로, 그리고 현실과의 관계에서 명칭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언어 체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기호는 기표와 기의를 내포하며, 이들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 두 구성 요소가 서로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된 언어 기호의 절대적 특성은 다시 영속적 대립 관계에 있는 가치의 변증법적 필연성을 요구하면서 언어의 구조적 원리를 형성한다. 어떤 원리의 생산성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는 그것을 증진하는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체계에 내재하는 조건 가운데서 기호의 참된 속성을 재구함으로써 우리는 소쉬르 자체를 넘어 소쉬르적 엄밀한 사고를 확정할 수 있었다.
-100~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