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70년에 발표된 ≪카무라스카≫는 큰 성공을 거두고 프랑스 서적상들이 주는 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 안 에베르의 명성을 높인 작품이다. 안 에베르의 소설가 여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카무라스카≫는 클로드 쥐트라(Claude Jutra)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1973년에 발표된 영화는 원작과 비교되며 여러 논쟁거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영화의 파급력 덕분에 ≪카무라스카≫가 대중에게 더욱 친숙하고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카무라스카≫는 1839년 1월 소렐과 카무라스카 지역에서, 당시 카무라스카의 영주였던 타시 아르쉴이 그의 부인의 연인이었던 닥터 홈즈에 의해 살해되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다.
소설 속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
일찍 과부가 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사생아로 태어난 엘리자베스 돌니에르와 함께 홀로 살다가, 독신으로 사는 그녀의 세 언니들이 거주하는 소렐의 집으로 옮겨 살게 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이모들에게서 종교 교육을 비롯해 정숙한 여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여러 가지 교육을 받지만 엘리자베스는 계속 남자애들과 놀기를 좋아하며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많은 호기심을 보이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꿈꾼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사냥터에서 알게 된 카무라스카의 영주인 앙투안 타시와 결혼해 카무라스카 대저택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이는 앙투안 타시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소렐의 집, 즉 그녀의 어머니와 세 이모가 함께 사는 집으로 피신한다. 그곳에서 앙투안 타시의 중학교 시절의 친구이며 미국 독립 후 캐나다로 이주한 ‘이방인’ 의사 조르주 넬슨을 만나게 된다. 이후, 엘리자베스와 조르주 넬슨의 열렬한 사랑의 모험이 이어진다. 엘리자베스는 조르주 넬슨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소렐의 사교계와 보수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결혼한 여인의 체면과 가문의 명성을 구하기 위해 남편 앙투안 타시와 거짓 ‘화해’를 하고 앙투안의 아이를 임신한 것으로 가장한다. 이런 모든 굴욕과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는 조르주 넬슨과 사랑의 정념을 불태우는 것이다. 결국 그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 앙투안 타시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엘리자베스의 하녀 오렐리를 시켜 독약으로 앙투안을 살해하려 했지만 그 계획은 실패로 끝난다. 그리하여 조르주 넬슨이 직접 앙투안 타시를 제거하려고 소렐에서 카무라스카까지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긴 여정을 떠난다. 1839년 1월, 마침내 앙투안 타시를 살해한 조르주 넬슨은 엘리자베스와 짧은 이별의 시간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었고, 곧 국경 넘어 다른 곳으로 도주한다. 엘리자베스는 홀로 남아 공범으로 의심받으며 수감되고 법정에 서게 되지만, 가문의 후광과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 유예되고 석방된다. 조르주의 도주와 부재로 불안을 느끼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소렐의 공증인인 제롬 롤랑과 결혼함으로써 그녀의 체면과 가문의 명성을 구한다.
이처럼 소설의 중심인물인 엘리자베스의 현재와 과거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카무라스카≫의 이야기 층위는 크게 분류해 엘리자베스의 현재의 삶과 과거의 삶을 알려 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대부분의 이야기가 중심인물 엘리자베스의 시점으로 전달되고 있다.
엘리자베스의 회상, 환상, 꿈의 형태가 혼합되며 전해지는 그녀의 내적 독백과 같은 이야기의 화자는 주로 엘리자베스 자신이기 때문에 독자는 엘리자베스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는 엘리자베스의 주관적 시선이 개입된 이야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는 작가로 동일시될 수 있는 화자의 목소리가 있으며 동시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목소리가 엘리자베스에게 또는 제롬 롤랑이나 조르주 넬슨에게 질문이나 조언 등을 하며 각 인물의 내면 상태를 알려 주기도 한다. 여러 화자의 목소리와 여주인공의 내적 독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분열된 자아의 목소리가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텍스트의 특성을 보여 주는 ≪카무라스카≫는 ‘글쓰기의 모험’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분열된 자아의 모습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소설 ≪카무라스카≫ 속의 인물들은 내적·외적 갈등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해 온 조르주 넬슨은 일찍부터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새로운 언어, 새로운 종교를 배워야 했고, 자유분방한 기질의 엘리자베스는 보수적인 사회에서 정숙한 여인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이중적인 모습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제롬 롤랑을 간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숙한 부인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삶을 열망하는 엘리자베스의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듯이 엘리자베스는 기존 사회 체제와 규칙과 질서에 편입해 안정된 삶을 보존하려는 욕망과 내면에서 끝없이 솟구치는 자유를 향한 열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이다. 이런 엘리자베스의 이중성은 소설의 시공간 구조에서도 나타난다. 큰 단위로 구분할 때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과거, 낮과 밤, 공간적으로는 대략적으로 소렐과 카무라스카의 이중적 구조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소설의 주제 차원에서도 삶과 죽음, 자유와 규제, 개인과 사회, 사회 속의 중심 집단과 소수자 집단(이방인, 여성 등),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등의 테마를 중심으로 소설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삶을 향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상반된 가치 체계 속에서 끝없이 갈등을 겪으며 분열된 자아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통해 ≪카무라스카≫의 작가 안 에베르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과 갈등의 역사를 지닌 퀘벡 사회에서 변화와 현대화의 과정 속에서 제기되는 정체성의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 차원에서 제기하며 이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200자평
프랑스 서적상들이 주는 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 안 에베르의 명성을 높인 작품이다. 1839년 1월 캐나다 소렐과 카무라스카 지역에서 당시 카무라스카의 영주였던 타시 아르쉴이 그의 부인의 연인이었던 의사 홈즈에 의해 살해되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다.
엘리자베스의 회상, 악몽, 환상 등이 혼합되며 여주인공의 분열된 자아의 목소리가 중요한 소설로, 글쓰기의 모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안 에베르는 캐나다 퀘벡 출신의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로, 퀘벡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여성 작가다.
지은이
안 에베르는 1916년 8월 1일 퀘벡에서 북서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생트-카트린-드-라-자크-카르티에(Sainte-Catherine-de-la-Jacques-Cartier)에서 태어났다. 아카디아 지방 출신인 그녀의 아버지 모리스 랑-에베르(Maurice Lang-Hebert)는 당시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후에 관광 사무소 책임자로 일하게 된다. 그는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퀘벡에 관련된 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연극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녀 부모의 문화 예술적 취향과 호기심은 어린 안 에베르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감춰진 문학적 소양을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 안 에베르는 청소년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녀의 첫 번째 습작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인지 희곡이었다. 이후, 안 에베르는 시 창작에도 열정을 보이며 1942년에 첫 번째 시집 ≪불안정한 꿈(Les songes en equilibre)≫을 발표해 호평을 받고 1943년에 아타나즈-다비드(Athanase-David) 상 콩쿠르에서 3등 상을 받는다.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은 1950년에 발표된 단편 모음집 ≪급류(Le Torrent)≫인데, 출간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최근에 재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희곡, 시,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시도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져 가던 안 에베르는 1950년대 초반에는 라디오 방송용 텍스트를 쓰기도 하며 생활한다. 그러다가 1953년에 국립영화제작소(O.N.F)에 취직되어 오타와에서 스크립터로 일하고 이후 몬트리올에서는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게 된다. 이 경험은 이후 그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나무로 된 방들(Les Chambres de bois)≫의 구상에 영향을 끼친다. 퀘벡을 다녀간 프랑스 비평가 알베르 베겡(Albert Beguin)이 안 에베르의 시를 프랑스 문단에 소개하면서 그녀는 프랑스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1954년에는 장학금을 받아 파리에 체류하며 첫 번째 소설 집필에 몰두한다. 1957년 몬트리올로 돌아왔다가 1960년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파리와 퀘벡을 오가며 생활한다. 이후 1965년 그녀의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파리에 체류하며 글쓰기에 전념한다. 그녀의 첫 번째 장편소설 ≪나무로 된 방들≫은 1957년에 프랑스-캐나다 협회로부터 상을 받고, 그 이듬해에 출판된다. 이후 그녀는 점점 더 알려지고 여러 협회와 단체로부터 여러 종류의 상을 받는다. 그러면서 안 에베르는 어느 정도 명성도 얻고 문단의 인정도 받게 되었지만, 그녀의 두 번째 소설 ≪카무라스카(Kamouraska)≫(1970)와 함께 진정한 작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동안 극작가이자 시인이며 단편 작가로 알려졌던 안 에베르가 소설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카무라스카≫는 프랑스 서적상들이 주는 상을 수상하며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고 1973년에는 클로드 쥐트라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소개되었다. 소설가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다진 안 에베르는 계속 파리에 거주하며 창작 활동을 한다. 이후에도 그녀는 수많은 상을 수상했는데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그녀의 세 번째 소설 ≪안식일의 아이들(Les Enfants du sabbat)≫로 1975년에 총독 상, 1976년에 프랑스 학술원 상을 수상했다. 또한 1982년에 안 에베르는 그녀의 다섯 번째 소설 ≪가마우지(Les Fous de Bassan)≫로 페미나 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 큰 영광을 누린다. 1984년에 프랑스 캐나다 학술원은 그녀의 작품 전체를 위해 그녀에게 메달을 수여한다. 1998년 초에 안 에베르는 30년 이상 거주했던 파리를 떠나 몬트리올로 돌아와 창작 활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2000년 1월 22일 몬트리올의 노트르담 병원에서 사망한다. 안 에베르는 말년에 한 어느 인터뷰에서 “이 나이에도 작가의 번뇌는 그대로 있다.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것 같은 느낌은 처음과 똑같다”고 말하며 작가의 끊임없는 고뇌를 토로할 정도로 생을 마감하는 시기까지 치열한 글쓰기를 지속했다고 할 수 있다. 혼돈된 사회 속에서 자아의 정체성 문제, 자아의 해방, 여성의 지위와 역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환상적인 문체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시도한 시인이자 극작가며 소설가인 안 에베르는 퀘벡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여성 작가다.
옮긴이
안보옥은 가톨릭대학교(구 성심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파리3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3년 현재 가톨릭대학교 프랑스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다수의 논문을 썼으며, 번역서로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의 시학의 단편들≫(2004),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2011) 등을 출간했다.
차례
카무라스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불모의 들판, 돌 아래에서, 아주 오래전 원시시대의 검은 여인이 산 채로 발견되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보존된 상태로. 사람들은 그녀를 작은 도시에서 놓아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사람들이 이 여인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그만큼 크고 깊은 것이다. 각자 속으로 말한다, 아주 오래전에 생매장된 이 여인의 삶에 대한 허기는 수 세기 전부터 땅 속에 축적되었으니 몹시 맹렬하고 전적일 거라고! 사람들은 분명히 그와 흡사한 경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달려가며 애원하는 여인이 도시에 나타날 때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닫힌 문, 그리고 길들이 닦여 있는 개간된 땅의 황량함뿐이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마도 허기와 고독으로 죽을 일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