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와 <헨리 부인의 편지>는 각각 플라마리옹 출판사의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 페루 여인의 편지 및 다른 서간체 애정 소설≫(1983)과 로베르 라퐁 출판사의 ≪18세기 여성 소설≫(1996)을 원전으로 삼았다.
1.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17세기의 베스트셀러
1669년 파리의 바르뱅 출판사에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편지”라는 부제를 달고 처음 출간되었다. 마리안이라는 이름의 포르투갈 수녀가 자신을 버리고 프랑스로 떠나 버린 포르투갈 주둔 프랑스 장교에게 쓴 다섯 통의 편지를 모은 형식의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1669∼1675년 21판이 나왔다. 이것은 당시 출판 상황에서는 대단한 숫자며, 이 작품의 인기에 힘입어 모작들도 쏟아져 나왔다.
편지의 화자 마리안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속에서 신음하며 자신의 열정을 애인에게 토로한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오비디우스의 <헤로이데스>의 전통을 계승하며, 또한 크레비용을 비롯한 여러 18세기 소설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다섯 편의 편지들은 각각 조금씩 다른 감정의 기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레오 슈피처는 이 다섯 통의 편지가 각각 고전 비극의 다섯 개의 막과 일치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다섯 통의 짧은 편지들에서 자신의 내면에 대한 자각의 단계를 통해 마리안은 비극의 여주인공에 버금가는 지위를 획득한다.
작자와 작품에 대한 논란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이 진짜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래서 마리안이란 이름의 수녀가 누구인지, 또한 그녀의 애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수소문이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의 남성이 1663∼1668년 포르투갈에서 근무한 샤미 백작이라는 설이 널리 퍼졌다.
1810년, ≪제국 저널≫에 실린 부아소나드의 기사에 의해 이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 초판 1부에 “이 편지를 쓴 수녀는 이스트라마도르와 안달루시아 사이에 있는 베자의 수녀인 마리아나 알코포라다며 그녀 편지의 수신인은 당시 생 레제 백작이라고 불리던 샤미 백작이다”라는 메모가 있다는 것이다. 베자 수녀원의 문서 보관소에 대한 조사에 따라 마리아나 알코포라다라는 수녀가 실재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실제 인물인 마리아나 알코포라다와 이 작품의 정확한 관계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고, 편지 내용에 나타나는 몇몇 정보는 마리아나의 실제 상황에 부합하지 않지만 그녀의 생애는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가 이 편지들을 직접 쓴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 작품이 실제 편지 모음이 아닌 픽션이라는 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는 문체에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완전한 픽션인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오리지널이 있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950년대에 1668년 당시 작품의 출판 허가 장부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이 장부에 의하면 <발랑탱,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 풍자시와 연가>라는 작품의 출판 허가를 받은 사람은 당시 잡지 ≪프랑스 가제트≫의 편집자였던 기유라그 백작이었다. 기유라그 백작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글을 쉽게 쓴다는 평을 얻고 있었으며, 당시의 유명한 문인들과 교류하던 아마추어 문필가였다. 또한 다른 여러 정황상 그가 이 작품의 작가일 가능성 또한 상당히 높다.
2. <헨리 부인의 편지>-≪감상적 남편≫에 대한 반박
이 작품은 1784년 초, 제네바에서 익명으로 출판된 서간체 소설 ≪감상적 남편≫에 대한 일종의 반박이다. <헨리 부인의 편지>의 작가인 샤리에르 부인은 소설 서두에서 주인공인 헨리 부인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다. 그녀는 당시 스위스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된 ≪감상적 남편≫을 읽자 “남편들은 모두들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인) 봉프레 씨라고 생각하고는 이제까지 어떻게 그렇게 묵묵히 참고 살아왔나 의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남편들을 고치고 싶고, 아니면 적어도 남편들에게 주의를 주고 싶어서” 자신의 편지를 출간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므로 <헨리 부인의 편지>의 편지는,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특수성과 보편성의 문제의 제기
<헨리 부인의 편지>에는 ≪감상적 남편≫과 비슷한 에피소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표면적인 유사성과는 달리 두 소설의 사건들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상황이나 디테일의 차이가 전혀 다른 의미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리에르 부인이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러한 뉘앙스의 차이다.
실제로 샤리에르 부인이 <헨리 부인의 편지>를 쓴 것은 남편들이 이러한 차이를 보지 못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의 상황을 해석하고, 정당화할까 저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헨리 부인이라는 허구적 인물의 입을 통해 들려주며, 표면적 유사성에만 의거한 섣부른 보편화를 경계한다.
200자평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와 <헨리 부인의 편지>는 17세기와 18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일인칭 서간체 소설이다. 2∼3세기 너머 여성들은 편지라는 영역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발휘했다. 우리는 편지들을 펼치며 프랑스 구체제에서 여성들이 처했던 조건의 일단을 보게 될 것이다.
지은이
가브리엘 드 기유라그(Gabriel de Guilleragues, 1628∼1685) 백작은 문학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물론 그는 ≪프랑스 가제트≫의 편집을 맡았고 이 잡지에 <튀렌 찬양>이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문필가로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으며 생전에 자신이 쓴 문학작품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은 적도 없다. 사실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의 작자에 대한 논란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도 그가 다른 작품을 쓰지 않았다는 데 있다. 당시 그는 <발랑탱,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 풍자시와 연가>의 출판 허가를 받았는데, 그중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만 따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두 작품의 연관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풍자시와 연가 모음인 <발랑탱>이란 작자 미상의 작품이 발견됨으로써 마침내 이 의문은 해결되었고 또한 기유라그 백작이 상당한 문학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당시 살롱에서 흔히 행해지던, 시를 이용한 유희에 쓰이는 시들로서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이며 문학적 가치도 현격히 떨어진다. 그러므로 만일 기유라그가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의 작자라면 그는 일생에 단 한 편의 걸작만을 쓴 문필가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이자벨 드 샤리에르(Isabelle de Charrière, 1740∼1805) 부인은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다. 그녀는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고, 심지어는 22세에 익명으로 <귀족(Le Noble)>이란 짧은 이야기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그녀는 귀족 신분을 내세우는 사람을 매우 냉소적으로 비판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31세가 되던 1771년, 남동생의 가정교사였던 5년 연상의 샤리에르(Charles-Emmanuel de Charrière de Penthaz)와 결혼했다. 그들은 곧 샤리에르 씨의 고향인 스위스로 이주해 뇌샤텔 캉통 소재의 소읍 콜롱비에에 있는 퐁테 저택에 정착했다. 그녀는 재기 발랄하고 열정적이었지만, 샤리에르 씨는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지나침을 싫어하고 과묵했다. 물론 샤리에르 씨는 소설에 나오는 헨리 씨와는 달리 배려심이 많고 아내에게 매우 자상했지만 성격적인 면에서 헨리 씨와 상당히 닮았다.
그녀가 소설 창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1782년에 출간된 네덜란드 소설 ≪사라 뷔르헤르하르트≫를 읽고부터다. 그녀는 이 소설을 읽고, 소설이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장소와 풍속을 그림으로써 허구적 인물에게 매우 큰 사실성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배경으로 1784년 ≪뇌샤텔 편지≫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뒤이어 출판된 <헨리 부인의 편지>는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내용 속에 특별히 영국적인 것은 거의 없다. 이 초기 작품들의 성공에 고무된 그녀는 뇌샤텔에서 멀지 않은 도시인 로잔을 배경으로 ≪로잔으로부터의 편지≫(1785)와 그 속편 격인 ≪칼리스트≫(1787) 등의 소설을 썼고 이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그녀의 대표작으로 간주된다.
그녀는 다양한 사람들과 편지 교류를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그녀와 ≪아돌프≫의 작가 뱅자맹 콩스탕 사이에 오고 간 편지는 매우 유명하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그녀는 프랑스의 여러 친지들과 혁명의 추이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았으며, 스위스로 망명한 프랑스 귀족들의 처지를 동정해 ≪망명자(L’Emigré)≫(1793), ≪망명자의 지갑에서 발견한 편지(Lettres trouvées dans des portefeuilles d’émigrés)≫(1793)와 같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프랑스의 망명 귀족들의 생활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간주된다. 그녀는 이후로도 정치, 여성 교육 등에 관한 다양한 글을 썼고, 실제로도 젊은 여성들과의 만남과 편지 교류를 통해 그녀들에게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1805년 65세로 퐁테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옮긴이
이봉지는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배재대학교 프랑스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Le Roman à éditeur≫, ≪서사학과 페미니즘≫이 있으며 역서로는 ≪수녀≫, ≪페루 여인의 편지≫, ≪공화정과 쿠데타≫, ≪육체와 예술≫(공역),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공역), ≪두 친구≫, ≪캉디드≫, ≪숙녀들의 도시≫ 등이 있다.
차례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
헨리 부인의 편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사랑아, 넌 어쩌면 그렇게 선견지명이 없었니? 그렇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거니? 아! 불쌍하기도 해라! 넌 배반당했어, 그리고 넌 또 나를 배반했어. 너의 그 헛된 희망으로 날 속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