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진화를 거스르는 투쟁
헉슬리의 강연은 강낭콩 줄기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탐험을 감행하는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콩 줄기를 따라 소년이 올라가 본 하늘 위의 세상은 지상과 똑같은 원소들로 이루어진, 일면 지상과 같은 세계였다. 하지만 거대한 강낭콩이 만들어낸 하늘 위 세계의 풍경은 이상스럽도록 새로웠다. 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는 누구나 사물의 본성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완전히 바꿀 수밖에 없을 만큼 새로웠다. 하지만 하늘을 뒤덮은 콩 역시 잎, 줄기, 뿌리, 꽃 등의 복잡하고 섬세한 기관들과 그 작용들의 집합체인, 콩은 콩일 뿐이었다. 이 섬세한 유기체가 하늘을 뒤덮으며 번성하기 위해서는 주변 식물들과의 경쟁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이 놀라운 생명체는 분해되어 사라지고, 남겨진 씨앗이 다시 싹터 어린 줄기로 자라면서 우주의 과정이 계속 될 것이다. 동물이나 인간 역시 식물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투쟁 과정을, 순환하는 우주의 진화 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인간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도 성공적인 투쟁 과정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인간 사회의 진보란 우주의 진화와는 반대되는 과정을, 즉 자신이 타고 오른 사다리를 걷어차고 새로운 태도를 갖추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문명화된 인간은 동물적인 투쟁을 죄악시한다. 문명사회에서 사람들은 심지어 적자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듯싶은 자의 목을 매달기까지 한다.
인류는 얼마만큼 성장했는가?
현대는 소년이 구름 위에서 보았던 문명 세계다. 헉슬리는 모든 청중들이 거의 외우고 있을 테니슨의 가슴을 울리는 시 <율리시스>로 강연을 마감한다. 현대는 호머의 시대 사람들처럼 악이든 선이든 그대로 맞대면하며 살아가는 원시적 유아기가 아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불교 철학자들처럼 악으로부터 도피하며 살아가야 하는 소아기도 아니다. 과학으로 무장한 성년기의 문명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모든 주어진 자연 조건을 그대로 수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어려운 상황을 회피해야 할 이유도 없다. 물론 언젠가는 거역할 수 없는 파도가 뱃전의 사람들을 심연으로 쓸어가듯이 우주의 과정이 인류 문명을 쓸어갈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악을 구축하면서 문명을 구축해 나가야 하는 성인인 것이다.
생존을 위한 해답
이 책의 내용은 갖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세기 초반의 철학자들은 헉슬리가 이 강연을 통해서 사실과 당위 사이의 논쟁에 있어 자연주의의 오류라는 개념을 확립하는 초석을 놓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20세기 중반의 사회학자들은 헉슬리가 이 강연에서 스펜서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만연해 있던 사회다윈주의를 부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인문학자들은 헉슬리가 과학혁명 이후 과학적 세계관을 인간사로 확장해 가는 ‘근대화’의 흐름을 거슬러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모습에 주목했다. 헉슬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현대 문명은 윤리적 세계를 지향하면서 우주 진화를 거스르면서 형성되어 왔음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통한 진화 과정은 여전히 국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 경쟁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국가 구성원들 사이의 경쟁을 자제하면서 윤리적 삶을 연마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200자평
인간의 윤리란 진화에 맞서 싸우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토머스 헉슬리의 ‘로마니스 강연’과 이에 대한 해설 격인 ‘서문’을 옮겼다. 헉슬리는 인간의 윤리가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은 진화가 이끄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윤리적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우주의 진화를 거스르는 현대 문명의 지나친 경쟁 구도에 경종을 울릴 만한 책이다.
지은이
토머스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
잉글랜드의 일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역 사립학교의 교사였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여덟 형제자매 중 막내였던 헉슬리는 초등교육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그래도 런던에서 결혼해 살고 있던 누나의 집에서 생활하며 왕성한 독서를 할 수 있었고, 과학은 물론 고전문학, 철학, 외국어 등을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가며 공부했다. 1845년 채링 크로스 병원 의학교에서 학위 과정을 마친 뒤 1846년 왕립 외과의 대학의 시험을 통과하고, 곧이어 남양 지역을 탐사하는 영국 군함 래틀스네이크호에 보조 외과의 자격으로 승선해 4년간 근무했다. 그동안 호주를 비롯한 남양 지역 해양 동물의 형태학, 비교해부학, 고생물학적 연구 결과들을 정리해 런던으로 보냈고, 그중 일부는 그가 영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학계에 발표되기도 했다. 귀국 후 과학인이 되기로 결심한 헉슬리는 1854년, 당시 새로 설립된 국립광산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헉슬리는 평생 영국 사회 내에서 과학 분야가 문화적 권위를 지니는 중요한 활동임을 강조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도시 빈곤층이나 노동자의 임금 문제와 같은 영국 제국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갈등, 그리고 외국과의 무역이나 식민지 문제에 대한 갖가지 사색에 잠겼다. ≪진화와 윤리≫는 그 와중에 행해진 강연이다. 이 글이 그의 총서 마지막 권을 장식하며 출판된 다음 해인 1895년 6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김기윤
1952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과학교육학과(생물 전공)를 졸업하고, 미국 오클라호마대학교에서 18세기 자연사 연구로 과학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폴 화이트의 ≪토머스 헉슬리: 과학 지식인의 탄생≫을 번역했으며,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시대의 초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차례
머리말
서문(1894)
로마니스 강연(1893)
로마니스 강연 노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정의라는 개념은 행위에 따른 상벌로부터 점차 정교해지면서 공과에 대한 상벌, 또는 다시 표현하자면 동기를 감안한 상벌로 변화해 갔습니다. 이제 정당한 행위란 단순히 정의의 동의어가 아니라 올바른 동기의 결과를 뜻하며, 도덕적 결백의 적극적인 구성 요소이며 선함의 본질로 간주되기에 이르렀습니다.
-77쪽
사회의 윤리적 진보는 우주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주 과정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윤리적 진보란 우주 과정과 싸우면서 얻어 내는 것입니다.
-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