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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화 (鄭在華) 지음,
정우락 옮김,
2022. 8. 28, 352쪽, 문집, 지만지, 지역고전학총서, 한국문학, 128*188mm
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근대를 넘어선 현대에 한문학이 가지는 의미
후산(厚山) 정재화(鄭在華, 1905∼1978)가 활동한 시대는 20세기,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점이다. 조선 시대가 마감되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발발했으며,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하고 다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을 거쳐, 세계화 시대로 들어섰다. 농업 사회는 몰락하고, 기계, 전기, 컴퓨터로 이어지는 산업 혁명이 급속히 전개된 시점에 한문학이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정재화는 근대를 살았지만 근대를 거부했다. 일제에 저항했고 창씨개명과 단발령에 저항했으며, 산간벽지까지 들어온 전기를 거부하고 한글 전용 시대에 한자로 의사소통을 했다. 저자 정재화를 비롯해 이 책에 언급된 유림들은 모두 어떻게 보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낙오한 이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흔적은 오늘날에 이어진다. 이들은 대학의 1∼2세대 한문학과 교수들을 직·간접적으로 배출했으며, 이들이 남긴 아직 정리되지 못한 자료들이 오늘날 지역학 연구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성호학파를 잇다
후산 정재화의 학문의 연원은 13대조인 한강 정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구는 영남의 양대 거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스승으로 섬기며 양대 학파를 회통했다. 정재화는 한강 정구로부터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는다. 또한 정재기와 정종호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밀양을 중심으로 한 성호학파와도 깊은 교유를 나누게 되니 영남의 주요 학파를 수렴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이러한 영남의 주요 학자들과의 교유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전통 문화와 학문을 통해 고도(古道)를 회복하다
근대의 문명과 이기를 거부하면서 정재화가 지키려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전통적 가치, 고도(古道)다. 그는 혼란과 고통의 시대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옛 도를 되살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전통 문화와 학문을 지켜 나갔던 것은 지나간 시대의 습관에 천착한 것이 아니라, 옛 선인들이 추구한 올바른 도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또한 유림단이 벌인 파리 장서 운동은 그에게 도를 바탕으로 한 “행의(行義)”를 깊이 자각하게 했다. 그의 스승 정재기는 일제에 항거해 파리 장서에 서명 후 자결했고, 정종호는 장서를 전달해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스승들의 모습을 본 정재화는 일경의 단발령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두 차례에 걸쳐 만주 망명을 기도하기도 한다. 심학으로 자신의 심성을 수양하고, 예학으로 사회적 질서를 회복하는 한편, 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책에는 정재화의 시 108제 170수와 문 세 편을 실었다. 전체 시 중 만사가 70% 이상을 차지하는데, 도의를 함께하고 교유를 나눴던 동지들과의 이별을 특히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이 만사들을 통해 당대 영남 지역 학자들의 교유 관계를 살필 수 있으며 그의 시문을 통해 그의 지향 의식과 자세를 살필 수 있다. 세상과 어긋난 자신을 절감하며 전통 학문을 고수하는 것으로 불화의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한 전통 지식인의 발자취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도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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